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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 계명으로 이훈삼 목사
2022년 4월 3일
요한 13:34~35
(요한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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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다섯째주일설교 (20220403/주민교회/이훈삼목사)

본문 : 요한 13:34~35
제목 : 다시 새 계명으로


1. 기독교의 정체성

1)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시작했고 개신교는 가톨릭 기독교에서 출발했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신앙 체계를 갖는 것은 각각의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구원 받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을 통해서라고 한다. 계명은 율법이고 법은 곧 강제력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유대교 신앙은 하나님 자녀로서의 법적 의무와 강박관념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부모님을 섬길 때 의무감으로만 부모님을 모신다면 부모와 자녀 관계의 본질은 아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 받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고백을 통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면서까지 헌신하는 사랑이다. 유대교가 아니라 굳이 기독교가 새롭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 신앙의 정체성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기독교의 본질이다.

2)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유훈을 남기셨다. 그동안 주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내용의 집약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 13:34~35)

유대교의 율법적 의무 신앙을 가지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온전한 관계는 불가능하다 선언하고 목숨을 걸고 새로운 방식의 구원을 제시하신 것이 곧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진정한 인생과 역사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확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3) 주민교회가 50년 전에 세워지고 오늘까지 여러 가지 활동을 해왔는데 그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고백은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에 대한 사랑,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이 우리교회의 맨 밑바탕에 흐르는 자기 고백이고 정체성이다.


2. 사랑의 연대와 대결

1)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사랑의 방식은 달랐다. 선한 이들에게는 격려와 위로를 주셨고 악한 이들은 경고하고 책망하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상대에 따라서 주님의 말과 행동은 똑같지 않았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을 복음서는 ‘무리(오클로스)’라고 했다.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별 볼일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 이들을 한국에서는 민중(民衆)이라고 번역했다. 주님이 목숨 바쳐 사랑한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삶이 지치고 고통스럽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이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이러한 민중의 반대편에는 권력·재산·학식·관계 등에서 힘 센 사람들이 있다. 주님은 이들을 잘 타일러서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이들이 들을 리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채찍을 들었다. 그러자 힘 있는 이들이 자기 치부를 지적하는 예수를 잡아다가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주님은 민중과는 사랑의 연대를 반면에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력자들과는 첨예한 대결의 관계를 형성했다. 사랑은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2)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민중(오클로스)은 가난하고 연약하고 못 배우고 간신히 하루하루 버티는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권력자들의 대도시에서 기생충처럼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더 열악한 곳으로 쫓겨났다. 민중이 쫓기고 쫓겨 내려온 곳, 거기가 성남(광주대단지)이다. 지금 성남은 양반이고 1970년대 초반 성남은 완전 빈민촌이었다. 당시 기독교 일부가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굳이 여기에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당시 오클로스가 버림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모습을 아파하면서 사랑하셨듯이, 이해학목사님을 비롯하여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민중을 사랑하기에 여기에 교회를 세운 것이 주민교회다. 그러므로 주민교회 첫 출발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요 그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민중에 대한 사랑이다.


3. 정의‧생명‧평화

1) 사랑은 생명·평화·정의로 표현된다. 주님도 이것을 선언하셨다. 주민교회는 이 메시아 선언을 교회의 목표 성구로 정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 4:18~19)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생명을 보호하고 평화를 만들고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다. 주민교회는 이 바탕 위에서 다양한 선교활동을 진행했다.

2) 1970년대 초반 성남에 사는 사람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빈곤으로부터 해방이었다. 모두 가난하고 살기 힘들고 내일이 없었다. 그래서 주민교회는 사람들이 빈곤을 극복하고 보다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해결하려 하였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의 취업을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가난하니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기에 무료진료를 열고, 맞벌이 나간 집의 방치된 아기들을 돌봐주기 위해 탁아소를 만들고, 신분상승의 유일한 기회인 교육을 받도록 야학도 열었다. 또 어디에도 취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활센터도 운영했다. 그리고 작은 돈들이 모여 누군가에게 큰 기초 자본을 확보해주는 신협 운동도 실천했다. 이 모두가 가난에서 비롯된 삶의 고난을 극복하고 보다 사람다운 삶을 살고 미래를 희망하기 위해 정의를 향한 선교활동이었다.

3) 1990년대부터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주민생협을 만들고 생명운동을 확대해나갔다. 그리고 아직은 생소했던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보호하는 운동도 시작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은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존귀하며,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이 곧 인류의 미래를 희망으로 이끈다는 것을 일찍이 선언하고 앞장선 것이다.

4) 성남지역 사람들의 가난과 고달픔이 그저 개인의 능력과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군부독재에 있다고 생각하고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래서 87년 민주항쟁 당시 우리교회는 성남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지역 사회 민주화와 인권 운동의 추동력 역할을 해냈다. 1990년 이후 우리나라가 지닌 모순의 원인이 군부독재인데 그 군부독재가 가능한 것은 남과 북이 통일되지 못하고 분단되어 북한 공산당을 막아내려면 힘 있는 군부가 정치를 해야 한다는 해괴한 명분이 되었으니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운동에 우리교회도 적극 참여하였다.
결국 주민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한 방식은 정의-생명-평화의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4. 서로 사랑하면서

1)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부분을 말씀하신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텐데 그것을 극복하고 구원하려면 제자들이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본질 상 같이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 도(道) 닦는 종교가 아니다. 세상과 같이 뒹굴면서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운동이다. 그래서 주민교회가 지향한 정의·생명·평화의 선교는 우리가 함께 특히 교인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주민들까지도 함께 동참하는 협동조합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주민신협·주민생협·의료생협·자활공동체·육아공동체·외국인노동자선교 등이 모두 이런 고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기장 민중교회운동연합 액자 그림

70년대부터 노동자·농민·빈민들과 함께 시작한 교회들이 1988년에 본격적으로 민중교회운동연합회를 결성한다. 우리교회도 민중교회의 초창기 교회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교회 사무실에는 우리 교단 민중교회운동연합(현재는 생명선교연대로 이름을 고침)이 기념으로 증정한 액자가 있다. 붉은 바탕의 고운 천에 자수로 그림을 수놓았다.
산과 들에 꽃과 풀이 피어나고 그 중심에 어린아이와 여성이 손을 잡고 한껏 노래하며 춤추고 있다. 여성은 힘차게 양 팔을 휘젓고 얼굴은 감격적으로 하늘을 향하며 옷고름 휘날리면서 해방을 만끽한다. 어린이도 손잡고 고개를 움직이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성경이나 우리나라 근대사회까지 여성과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다.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들을 대표해서 여성과 어린이가 굴레를 벗고 자유롭게 삶을 누린다.
여성의 머리 위에는 작게 그려진 남성이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어린아이의 윗부분에는 군화를 신은 것 같은 건장한 남자(?)가 엎어져 있는 것 같다. 자유와 해방은 불의한 권력이 붕괴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다. 하늘엔 한가로이 구름이 떠 있다.
이 역사의 현장을 자주색 띠가 십자가 형태로 둘러싸고 있다. 그림의 구도 상 십자가가 아래까지 완전히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모든 과정과 결과는 모두 십자가의 신앙과 은총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5. 개체적 사고와 구조적 사고

1) 이웃을 사랑하고 연대하는 방식에서 개체적 사고인지 구조적 사고인가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나뉜다. 보수 기독교 신앙은 인간과 세계를 개별적으로 본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 그러니 선교는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반면에 진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삶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인간을 구원하려면 세상의 불의한 구조도 함께 개혁해야만 한다고 여겨 시스템(구조)의 개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 교회가 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 정치 개혁, 환경 운동, 통일 운동에 참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진정 인간답게 살려면 개인의 변화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개인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의 큰 틀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개인 삶의 향상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교회는 사람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민주화·인권·환경·통일 등 사회 구조의 변혁 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2) 아직도 우리 사회는 보수적인 개별적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특히 군부독재의 폭압적인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하되 개인을 돕고 후원하는 것은 독재정권과 마찰할 일이 별로 없지만, 사회 구조개혁을 주장하는 진보 교회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수립하여 권력과 부딪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꺼린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교회가 진보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은 개인의 변화만큼이나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에 진보교회들이 더 많아져서 개인의 변화 추구와 함께 사회 구조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우리교회의 선교 방식은 앞으로도 사회 구조의 변화를 촉구하는데 조금 더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것은 곧 거대담론과 정치·사회적 운동을 의미한다.


6. 민중에서 지구시민에로 변환의 문제

1) 지난 창립49주년기념 강연회(2022.3.1.)에서 강사 하동근원장님(판교생태학습원)은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잘 정리해 주었다. 지난 50년 한국 사회의 변화 특히 우리교회 선교의 1차 지역인 성남지역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지역의 변화에 따라 주민교회 선교의 대상과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리 모두가 깊이 고민하고 협의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소중한 강연이었다. 핵심은 이렇다.
50년 전 가장 빈곤한 지역이었던 성남은 그동안 엄청나게 변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분당과 판교가 개발되었고, 가난의 중심지였던 성남 구 시가지도 대규모 개발을 통해 중산층 지역으로 변화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성남은 더 이상 민중이 사는 지역이 아니라 중산층이 사는 시민의 지역으로 바뀌었으니 이제 주민교회의 선교도 민중에서 시민 중심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단 그 앞에 지구(시민)가 붙은 것은 중산층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화두는 생명의 세계를 지키고 유지시키는 환경 문제이고 이것은 어느 한 지역의 문제만 아니라 전 지구적 공동과제니 세계라는 관점의 생각을 가지고 지구 환경을 지키는 선교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안이었다. 또한 성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민원이 훨씬 많은데 이런 현상은 사회적 신뢰의 부족에서 생긴 것이니 교회가 나서서 성남의 신뢰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2) 민중에서 (지구)시민으로! 매력적인 제안이다. 민중은 관념적으로는 아름답지만 민중이 처한 삶의 현실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민중이 아니다. 경제·교육·주거·건강 등 이미 우리는 대부분 중산층이다. 거대 자본가-상층 부르주아는 아니라하더라도 분명 소 중산층(쁘띠 부르주아) 정도는 된다. 그리고 정말 성남 지역은 빠르게 중산층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분당판교와 더불어 위례도 이미 중산층이 살고, 지금 한창 개발하고 있는 구 시가지도 아파트 다 짓고 나면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중산층만이 가능하다. 10억이 넘어가는 아파트에 어떻게 민중이 들어와 살 수 있는가. 머지않은 날에 교회 주변은 대개 중산층 사람들이 들어설 것이다. 그러니 이제 50년 동안 우리가 연연해하고 있었던 민중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과감하게 중산층 중심의 교회로 바꾸고 선교과제도 그렇게 설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현실적인 제안이다. 좀 고민스럽다.

3) 고민의 첫 지점은 과연 성남 지역이 모두 개발되어 대부분 중산층이 들어와 산다고 하여 성남 지역 전체에 민중은 사라질 것인가. 도시가 개발되고 중산층이 주를 이룬다고 해도 성남 어느 곳에서는 기본적인 삶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민중교회를 표방하며 시작한 주민교회마저 민중의 짐을 벗고 중산층에 초점을 맞춘다면 개발의 그늘에서 신음하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민중은 누가 섬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주민교회는 민중교회인가 하는 물음이다. 민중교회란 교회의 구성원 상당수가 민중이고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에 민중이 중요한 인물로 참여하며 교회의 활동 방향과 내용이 민중의 구원을 지향하는데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민중교회라기보다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민중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교회 정도라고 보는 것이 솔직할 것 같다. 편차는 있지만 교인 다수는 중산층이고 그러니 당연히 교회의 운영과 의사결정에 민중 아닌 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교인들의 의식도 이미 민중의식이 아니라 중산층 의식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부러 민중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 가난한 삶을 자처할 수 있을까. 그건 쉽지 않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이미 너무 많이 중산층화 되어 있다.

4) 결국 남는 것은 우리 안에서 민중의 지위를 보다 넓게 확보하는 것이고 성남 지역의 민중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로 집약된다. 우선 성남과 한국 사회에서 민중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는 누구인지 찾아야 하고 그 다음에 이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태생부터 민중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유전자를 가지고 주민교회의 역사를 이뤄온 것이다. 그리고 민중과의 연대와 더불어 지구시민으로서의 선교활동도 더해야 한다. 지구 전체의 생명을 살리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창조 신앙을 철저하게 고백하면서 나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주민교회에서 예수 믿기가 참 쉽지 않다.


7.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정체성

1) 인간과 세계를 개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일(노동)과 돈의 관계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하여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하는 운동이 사회개혁운동이다. 그 핵심에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운동이 있다. 그것은 기존의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실제 노동하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다.
문제는 오랫동안 힘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신분·자산·군사력·지식·관계 등)이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쉽사리 내주지 않으려 했고, 결국 해결 방법은 무력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 싸움은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 등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인 바람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러넘쳤다.

2) 사회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사회 개혁 운동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사회과학은 군부독재에 시달리던 한국 국민들에게 놀랍고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1970~80년대 지성인사회와 노동운동에는 사회과학 열풍이 불었다.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86세대다. 사회과학은 과학이다. 인간과 사회의 현상을 관찰·분석·해석하여 문제점을 찾아내고 대안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회과학의 특성은 눈에 보이는 것,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대상으로 삼으며 따라서 명증하다. 모호한 것이 없다. 그동안 다분히 감성적으로 사회개혁 운동하던 시대에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과학은 거의 구세주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세상이었다. 대학가와 노동계가 사회과학 이론 학습에 집중했고 거의 모든 책은 사회과학 책이었으며 사회과학 출판사와 서점이 대폭발했다. 그리고 당시 진보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여기에 경도되었다. 하나님과 교회를 말하지만, 교회를 운영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신학이 사회과학화 되었고, 교회는 사회 개혁 운동 단체와 비슷해졌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3) 군부독재와 재벌이 대표하는 기득권 세력은 악이며 그 악은 정의를 위해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개혁 세력은 독재자와 재벌 타파에 집중했고 교회도 여기에 동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루어냈으며 교회도 이 과정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는 혁명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악에 대한 증오를 에너지 삼아 성장하는데 교회도 이 분위기에 휩쓸렸다는 점이다. 교회마저도 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선악을 나누며 그른 것과 악은 제거의 대상이 되니 비판과 분쟁과 충돌의 분위기가 기독교인 개인의 내면과 교회의 공기를 지배했다.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기독교의 사랑은 점점 질식해갔다.
흠 없고 의로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만큼 부조리한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기독교는 이처럼 부조리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강렬할수록 기독교의 사랑과 십자가 방법론은 설 땅이 없어진다. 억울하고 불의해도 그것을 우리가 스스로 수용하면서 손해보고 희생하는 기독교의 사랑이 약화되었을 때, 교회는 본질 상실의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4) 사회과학과 기독교 신앙, 시민단체와 교회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다. 기독교와 교회는 근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에 기반하며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뜨거운 응답으로 민중을 사랑하고 연대하며 우리 스스로를 헌신하면서 세계의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이 여러 번 강조했듯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둘째 이반과 셋째 알료사의 대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 선교는 곧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며 스스로 좌초하게 된다. 이것은 교회 내부에서 끊임없는 하나님 사랑의 체험과 신앙 훈련을 통해서 유지해야 한다. 이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기독교의 예수 운동은 아주 쉽게 하나님 없는 사회개혁운동으로 전락한다.

5)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격랑의 시대였다. 주민교회는 바로 그 시대에 출발했고 군부독재와 재벌의 횡포에 대결해 왔다. 한국사회의 요구는 거절할 수 없이 절박하고 거셌다. 주민교회는 이 요구에 최선을 다해 응답했고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거대담론과 사회문제에 천착할수록 내부의 기독교적 신앙훈련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와 사회를 동시에 섬기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잃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교회의 내적 신앙 훈련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니 힘겹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민교회를 부르셔서 이 사명을 맡겨주셨다. 50년을 달려온 주민교회는 향후 50년을 내다보면서 다시 한번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서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함께 이야기할 것들
- 아래 사항 외에도 발제에 대한 느낌‧의견‧제안 등 자유롭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2. 주민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3. 앞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대상인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
1) 성남 지역 2) 한국 사회

4. 개인보다 사회 구조 개혁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5. 성남지역에서 주민교회의 현재 이미지와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6. 우리가 하고 싶은 선교를 감당하기 위해 적당한 교인 수와 재정은 얼마일까?

7. 기타 아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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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2022-2-13 신명기 4:32~34 지난 날을 상고하라!    이훈삼 목사
440 2022-2-6 예레미야 23:28~32 주님의 음성을 전하는 교회    이훈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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