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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단지 악마적 폭력이 있을 뿐!(새가정사2015년6월호) 주민교회 (juminch)
2016년 11월 21일 22시 35분 42초 544

“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예레미야 4:19)
 

 



 

프란시스 고야, 1808년 5월 3일, 268*347cm, 1814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그림 출처 : 서경식, 나의 서양 미술 순례, 2004년,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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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은 이탈리아, 플랑드르 지방(프랑스 북부,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가 주도했지만, 스페인은 이들과는 다른 새로운 영감을 화가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94%가 기독교도이며 한 때 세계 선교의 중심이었으면서도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무려 8백 년 동안이나 이슬람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독특한 역사가 그들의 문화에 짙게 가라앉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엘 그레코(1541-1614), 벨라스케스(1599~1660)와 함께 스페인의 3대 화가로 사랑받는 프란시스 고야(1746~1828)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계몽과 혁명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의 격동기를 직접 몸으로 겪었다. 그는 스페인 황제의 궁정화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중의 고단한 삶을 눈으로 보고 역사로 남겨 놓았다.

 


 

유럽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를 폐위하고 자기 형을 그 자리에 앉힌다. 이에 분노한 스페인 민중이 1808년 5월 2일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다음날 프랑스 군은 스페인 민중에 대해 가혹한 보복을 감행한다. 6년 동안의 프랑스 통치가 끝나고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복귀했을 때,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라는 그림으로 그날의 역사를 복원하여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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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고 얼굴과 몸이 깨진 사람들이 시체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아직 살아있는 순박한 사람들은 코앞의 총부리에 타고 앉은 죽음에 직면하여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줄 모른다. 차마 쳐다볼 수 없어 두 손으로 눈을 가려보지만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흰옷 입은 남자 옆 사람은 입술 굳게 물고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최후의 힘을 모아보지만 그것으로 대항하기에는 너무 빈약하기만 하다. 흰옷 입은 남자는 머리가 쭈뼛 섰고 짙은 눈썹은 팔자로 긴장하며 불의한 폭력에 맨손으로 저항한다. 나를 쏴라, 나를 짓밟아 봐라, 그런다고 우리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까? 활짝 벌려 높이든 그의 양 팔은 마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의 모순과 고난을 두려움 속에서도 순순히 당하는 ‘어린 양’처럼 스페인 민중은 그렇게 폭력 앞에서 쓰러졌다, 아니 세계의 민중은 모두 그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그냥 소시민으로 먹고살아가는 맨몸의 이들을 가혹하게 처형하는 프랑스 군인은 마치 총살을 감행하기 위해 특별 제작된 기계처럼 딱딱하다. 일직선의 총, 일직선의 자세가 만나 기역자 형체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총을 쏘고는 있지만 일말의 양심도, 피눈물도 없는 기계는 아닌 것 같다. 이 처형을 차마 눈뜨고는 집행할 수가 없었는지 군인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이들도 살인을 즐기는 악마가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이 처참한 죽임의 현장을 책임져야 할 악은 누구란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악마는 따로 있건만 현장에서 맞부딪치는 것은 순박한 민중과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일선 군인, 경찰이다. 악마는 피해자들끼리 죽이고 죽임당하는 부조리한 현장의 뒤편에서 언제나 축배를 들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를 관통할 수 있는 영묘한 눈(영안 靈眼)이 절실하기만 하다.

 

 

 



 

이 죽음의 순간에 여기저기서 기도소리가 들린다. 머리가 많이 벗겨졌지만 꽤나 젊은 초록색 바지 남자는 그 큰 눈에 눈물을 담고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꽉 쥔 채로 기도하고 있다. 그의 두려움은 보는 이들마저 가슴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해도 죽음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죽음의 현장, 구원의 절규가 가득한 현실 지옥에 구세주의 이름으로 개입해야 할 뒤편의 거대한 교회(성당)는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조용하다. 칠흑 같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기 위한 어떤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검은 어둠 속에 고요히 잠겨 있을 뿐이다, 악의 권세에 묻혀버린 교회! 그나마 화가가 교회 건물에 저 정도 밝기라도 부여한 것은 종교가 불의한 현실에서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의미라고 애써 위안을 삼아야할까!

 

어찌 우리 잊으랴,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 세상 모든 폭력은 악이며, 가장 잔인하고 광범위한 폭력의 정점에 전쟁이 있다. 복음은 어떤 전쟁도 찬성할 수 없다, 설사 그것이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우긴다 할지라도 말이다.

 

덧붙임 : 2006년에 제작된 ‘고야의 유령’이라는 영화는 고야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1,000원이면 다운받아 영구 소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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