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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뷔르낭, 부활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 83*135cm, 1898년, 오르세미술관
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들이다. 직업, 재산, 고향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와 가족까지 단절해야만 그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그럴만한 충분한 희망이었다. 메시아 등극만 하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는 너무 어이없게 죽임 당했다. 배신에 이은 재판과 십자가 처형, 이것으로 길고 고단한 여정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끝 모를 추락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믿어지지 않는 소식을 여인들이 가지고 왔다. 주님의 시신을 두었던 무덤의 문이 열려있었고 주님은 보이지 않았으며 천사가 나타나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내달렸다.
아직 새벽 기운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달린다. 하늘, 바람, 구름, 산과 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다. 달라진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 눈으로 보았듯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믿으라는 것인가? 화가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가는 동안 두 제자의 심리를 그린 것 같다.
헝클어진 머리와 깊은 주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드로의 인생 연륜이 묻어난다. 이제는 웬만한 이야기는 들어만 봐도 사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번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현장을 향해 질주한다. 그의 동공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단단한 손은 가슴에 대어 자신도 모르게 뛰는 심장을 다독거리나 보다.
복음서에는 베드로만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화가는 요한까지 넣어서 둘이 달려가는 것으로 그렸다. 젊은 요한은 베드로보다 조금 앞서서 달리는데 불안과 흥분은 다르지 않다. 그는 두 손을 꼭 잡아 모으고 달린다. 요한의 간절함은 손에서 그치지 않고 얼굴 표정으로 깊게 이어지고 있다. 무언가 울컥하고 넘어올 것 같은 감정을 애써 참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모른다는 당황스러움이 그의 두 눈에 힘을 주었고 그에 따라 짙은 눈썹과 미간에는 골이 생겼다. 표현할 수 없는 불안과 기대의 교차랄까!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발걸음은 한 시라도 지체할 여유가 없고, 한 눈 팔 상황도 아니다. 오로지 그 소식을 향해 온 몸과 마음과 눈동자를 모아 달려가는 우리 삶의 핵심이다.
주일은 그런 거다. 그저 편하게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를 잔뜩 긴장시키며 한 걸음에 달려가게 만드는 생명의 에너지다. 그래서 진정한 안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