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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7 강릉 허난설헌(1563~1589년) 기념관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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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1년 11월 22일 23시 43분 56초

<2021.11.7. 주보 그림>

강릉 허난설헌(1563~1589년) 기념관 

고즈넉한 기념관 입구에서 허난설헌 동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강릉 명문가의 집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조선 최고의 여류문인이다.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많은 작품들을 모두 불태워버렸지만 누이의 재능과 작품을 아까워한 ‘홍길동전’의 저자 동생 허균이 보관한 것들 일부가 그나마 살아남아서 시집 ‘난설헌집’으로 엮였다. 이후 이 시집이 17~8세기에 명나라와 일본에 까지 전해져 격찬을 받았다고 한다. 시는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은 맑고 아린 여성의 심성을 지니고 있다.

맑고 넓은 가을호수에 푸른빛이 구슬처럼 빛나는데 
연꽃 덮인 깊숙한 곳에 목란 배를 매어두었네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꽃을 따서 던지고는 
행여 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본명이 초희인 허난설헌은 당대 거물 정치인 허엽의 딸로서 진취적인 가풍에서 태어나 오빠들과 함께 자유롭게 공부하면서 자랐다. 열다섯에 안동 김씨 집안에 시집가서 경기도 광주에서 살았다. 남편 네는 그녀의 집과는 달리 보수적이었고 여성에 대한 그 시대의 통념에 머물러 있었다. 남편은 시대를 뛰어넘는 감성과 자기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부인을 버거워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 안에 갇혀 그것을 뛰어넘는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면서 시시콜콜 간섭하는 시어머니와 계속해서 과거에 낙방하는 무능한 남편 때문에 허난설헌은 힘겨운 날들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감성과 시대를 넘는 정신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해 사이에 돌림병으로 딸과 아들을 이어서 잃고 셋째마저 유산되자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버텨낼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고 젊은 나이에 그만 짧은 삶을 마감하고 만다. 난설헌 허초희가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허난설헌은 한국 역사의 중세 시대에 살았지만 그의 생각 속에서는 이미 근대적 요소들이 싹트고 있었고 그는 시를 통해 먼 미래를 앞당겨 살았다.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은 강릉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들었다고 하여 오늘날 초당두부의 기원이 되었고 지금도 기념관 가까이에 유명한 초당두부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