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영화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은폐되었음을 폭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장면을 다루는 등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도왔던 종교계의 활동이 부각되며 눈길을 끌었다.
비록 영화에는 개신교계의 역할이 많이 다뤄지지 않았지만, 당시 6월 민주항쟁을 이끈 데에는 교회의 노력이 있었다.
개신교계의 주도로 설립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실제 민주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개신교계가 앞장서서 설립했다.
당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장이었던 고(故) 박형규 목사가 국민운동본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상임집행위원장은 오충일 목사, 대변인은 인명진 목사가 맡는 등 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해 가는 과정 가운데 개신교계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로 섬기며 개신교계를 대표해 국본 조직 실무를 담당했던 황인성 민주평통 사무처장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기인대회에 참여하는 명단부터 시작해서 제반 순서지와 선언문 자료 등을 다 만들었다”고 밝히며, “그 당시에 무엇보다 장소를 안전하게 확보해 발기인대회를 성사시키는 일이 중요해서 그 일을 개신교계가 맡았다”고 말했다.
경찰 감시 피해 국본 발기인대회가 열린 향린교회
1987년 5월 27일에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기인대회를 앞두고, 오충일 목사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과 종로 5가의 복음교회, 명동성당과 향린교회를 찾아가 관계자들에게 장소 사용을 비밀리에 요청했다.
그리고 27일 아침 황인성 사무처장이 발족 장소 후보들을 한 군데씩 돌아보며, 경찰의 감시를 피해 발기인대회를 진행할 곳을 정탐했다.
황 사무처장은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 갔는데, 프레스센터와 대성당 근방에 전경차가 두 대 정도 있었고, 복음교회는 근처 기독교회관 근방에 사복형사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며, “명동성당 앞에는 형사와 전경들이 있었지만 향린교회 근방에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상황을 보고했다”고 말했다.
황 사무처장의 보고를 들은 오충일 목사는 발기인대회 장소를 향린교회로 최종 결정했다.

장소가 결정되자 황 사무처장은 미리 약속한 서울 종로 수협중앙회 건물의 한 다방에서 각계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발기인대회가 향린교회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