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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 주민교회 50년 선교사업의 성과와 반성 발제자 / 이상락 1. 들어가며 성남은 70년대 광주대단지와 90년대 분당이 서울의 위성도시로 개발된 농촌‧도시‧공단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다. 71년 서울 철거민들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촉발된 광주대단지 사건은 성남 주민운동의 역사적인 출발점이 되었고 주민교회 창립의 계기가 되었다. 현재 성남시 수진‧ 태평‧신흥동 지역, 즉 당시 광주시 중부면 일대를 중심으로 주민교회 선교역사가 시작되었다. 2. 주민교회 창립 배경과 정체성 확립 주민교회는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위원장/박형규목사)가 이해학전도사를 성남으로 파견하고 1973년 1월부터 활동하면서 시작했다. 이해학전도사는 그해 3월 1일 12명으로 다음의 취지로 주민교회를 창립한다 : 주민교회는 성남의 수많은 교회 중에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가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영역에서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주민교회 목표 성구: 누가복음 4장18절 - 주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선교).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해방신학),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의식화),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평화통일),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자유). 주민교회는 2004년에 다음과 같이 교회 정관을 제정했다. “주민교회는 1973년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파송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성남에서 해방된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빈민선교로 출발하였다. 주민교회는 약자와 억눌린 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모든 구조적인 악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민중교회이자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여 분단을 극복하고 남북이 하나 되기를 바라는 민족교회이며 구약의 희년정신과 신약의 초대공동체를 계승하여 예수님의 영으로 하나 되는 하나님나라 건설의 사명을 담당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주민공동체로 하여금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을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도록 부르셨으며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였다. 지난 세월 우리의 투쟁과 고난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기도이자 신앙 고백이다. 이제 주민교회 성도들은 이 신앙고백의 온전한 계승과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생명공동체를 지향하는 평신도 교회로서 교회 운영과 조직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혁 하고져 하는 뜻을 담아 교회 운영과 활동의 원칙을 정하는 정관을 제정한다.” - 주민교회 선교표어: “주민과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 - 주민공동체 헌장 제정 - 머릿돌 : 진리의 터, 정의의 기둥 - 신앙고백서 : 2003년 3월 1일(창립 30돌) - 실천 선언문 : 2004년 3월 1일(창립 31돌 주민교회는 설립부터 성경과 하나님의 선교를 토대로 목표성구‧선교표어‧공동체헌장을 제정하고, 정관을 만들었고, 신앙고백서와 실천선언문을 만들면서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형식에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실험하면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교회의 갱신을 위해 노력하여 왔다. 3. 주민교회의 초창기 활동 가장 먼저 시작한 활동은 무료 한방진료다. 이것은 20여 년 동안 지속되었고 80년대에는 치과진료도 병행하였다. 또 성남실업자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남시와 협상을 통해 공공근로사업(취로사업)권을 취득하여 시급한 생계 문제 해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5년에는 직업 상담실을 운영하고, 의료 협동회를 조직하여 병원설립도 추진하였으나 당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때 노동자 야학을 열어 운영하다가 역시 공권력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고, 대신 주민도서실을 운영하였다. 주목할 사건은 교회 창립 첫 해 성탄절 예배를 김포공항에서 드린 일이다. 당시 성탄절을 준비하며 주민교회 학생회는 이해학 전도사와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임하셔야 할 곳, 한국사회의 가장 큰 아픔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이 김포공항이었다. 당시 김포공항은 일본 관광객들이 성매매를 위해 대한민국에 첫 발을 내딛는 곳이자, 외국자본이 우리의 고혈을 빨아가는 통로였으며, 당시 박정희정권이 김종필을 보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기 위해 출국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포공항 예배 현장에서 전원이 영등포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고문을 당하고 이튿날 훈방조치 되었으나, 이해학전도사는 며칠간 갖은 고초를 겪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어쩌면 이후 주민교회가 걸어가는 길의 신호탄 이었는지도 모른다. 4. 주민교회의 지역 선교 활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 1) 이해학목사의 반복된 구속과 석방 이해학전도사는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 등으로 구속되면서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유언비어와 협박 등 공권력의 교회 파괴 공작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교회의 양적 성장은 멈춰 질 수 밖에 없었으나 신앙이 질적으로 깊은 성장을 이룬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때 독일 서남지역교회(EMS)의 주민교회 격려방문과 지원금은 교회 신축부지 1,240평을 마련하는 귀한 마중물이 되었다. 한편, 1974년 긴급조치1호가 발표되자 당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는 독재정권이 민간의 활동을 방해하고 활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현실에 더 이상 빈민선교를 계속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긴급조치 1,2호 반대와 유신헌법 폐기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만들어 1월 18일에 외신기자회견을 하였는데, 이때 많은 민주인사들이 체포되었고 이해학전도사는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교회 창립 1년도 되지 않아 목회자가 구속당하자 주민교회 신도들은 총회 사무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소연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목회자가 빨갱이로 구속되었다고 하자 교회 건물 주인이 강제로 교회를 폐쇄하여 임시로 이해학전도사 사택으로 교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경기노회가 100만원의 헌금을 모아 주어 신흥동에 40여 평의 건물을 임대하여 신앙생활을 지속 할 수 있었다. 1974년 민청학련‧인혁당‧육영수여사암살 등 정치적 격랑을 겪으면서 정부는 1975년 2월 15일 이해학전도사 등 긴급조치로 구속자들을 석방하였다. 그동안 빨갱이교회라는 편견으로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으나 끝까지 교회를 지킨 사람들은 주로 실업자‧노인‧학생 등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2) 도피와 두 번째 시련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문사건(명동성당)이 발생했다. 이해학전도사는 3월 10일 선언문 관련자 20여명이 체포되자 주민교회 청년 김금용을 시켜 구국선언문을 배포하게 하였는데, 결국 3월 17일 김금용 청년이 구속되었고, 이해학전도사는 도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실업자대책위원회‧의료협동회‧야학 등의 선교사역이 강제 폐쇄되었고, 공권력에 의해 교인들 집은 압수수색을 당했으며, 몇몇 교인들은 수차례에 걸쳐 경찰서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민교회와 이해학전도사 사택에는 정보과 형사들이 늘 상주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주민교회는 쑥대밭이 되었다. 이해학전도사는 도피 생활하다가 민주구국선언 사건 1심 재판이 끝난 9월 7일 중앙정보부에 자수하였고,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재수감되었다. 1978년 8월 15일 형집행 정지로 풀려난 이해학전도사는 교회로 돌아와 교회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교인은 1/3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당국의 지속적인 감시‧위협‧회유에 결국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남은 교인은 노동자‧노인‧학생‧청년들 몇이 전부였고, 평생 가난하게 살아왔기에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이들이었다. 3)교회 창립 기념행사 : 시국강연회와 꼴찌마라톤 교회는 1975년부터 매년 창립기념일(3월 1일)에 시국강연회와 꼴찌마라톤대회를 개최하였다. 강연회는 성남뿐 아니라 서울 등 민주화를 열망하는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상징적인 행사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런 탓에 강연 시작 전에 강사가 경찰에 연행되는 등 공권력의 탄압이 심화되었고, 강연회 후 진행되는 꼴찌마라톤은 성남의 해방구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강연회에는 당대 주요 민주인사인 함석헌선생‧김재준목사‧송건호선생‧문익환목사‧안병무박사‧박형규목사‧한승헌변호사‧한완상박사‧김근태선생 등이 연사로 초빙되었으니 당국도 초긴장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주민꼴찌마라톤은 반독재 민주화와 통일운동 관련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대로를 누비며 구호를 외쳤으니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참가자들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다보니 마라톤인지 데모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어린아이‧장애인‧청소년‧청년‧장년‧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이 골고루 조를 짜서 걷고 뛰고를 반복하니 경찰은 잡아 갈 수도, 최루탄을 쏴서 해산 시킬 수도 없는 지경이었기에 경찰도 난처했을 것이다. 4)주민신협 창립(1979년)과 주민두레생협 창립(1989년) “푼돈 모아 사글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내집 마련을 위하여! 신협”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 소비자와 생산자의 동반자! 생협” 이해학목사는 1979년, 47명의 교인들을 모아 47,800원의 출자금으로 주민신협을 설립하였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9년에는 주민두레생협을 설립하였다. 5)김종태열사 분신 사망 사건(1980년, 당시 22살) 주민교회 김종태청년은 전두환 계엄군의 광주시민 학살에 항거하다 1980년 6월 9일 서울 신촌 로터리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를 외치며 분신 사망하였다. 공안당국은 장례식마저 방해하였고, 열사를 파주 기독교공원묘지에 어렵게 안장하였지만 며칠 후 묘비마저 탈취당하여 경찰과 힘겨운 싸움 끝에 비석을 되찾았던 아픔도 있었다. 그 후 주민교회는 당국과 끈질긴 투쟁 끝에 열사를 광주망월동묘역에 안치하였다. 김종태열사는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이 제정되며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열사의 유가족은 후에 받은 보상금을 교회에 장학금으로 헌금하여 교회는 장학기금으로 운영하였다. 6)성남 YMCA 창립 당시 성남에는 시민운동 단체가 전무한 상태여서 이해학목사는 기독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성남YMCA를 창립하였다. 주민교회 청년 이숭일‧한숙자‧이상락이 리더로 참여하여 역사연구모임‧성서연구모임‧근로자야간학교‧근로자합창단‧싱어롱모임‧고교Y‧시민중계실 등 활동을 전개 하였다. 에피소드 1 : 젊은 청년이 주말만 되면 Y 앞을 서성거리다가 이상락을 보고 여기가 뭐 하는 데냐고 물어 설명해 주니 자기는 사법 연수원생인데 집이 상대원이어서 주말마다 외출 나온다면서 Y에서 법률상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느냐 물었고, 그때부터 시민운동에 첫 발을 내 디딘 사람이 바로 이재명 전 민주당대통령후보다. 에피소드 2 : 성남Y 근로청소년야간학교는 이상락이 대표를 맡아 활동했는데, 당시 성균관대 학생이 자원봉사 야학선생을 했다. 그가 바로 성남시 4선 의원과 시의회 의장이 되어 이번 지방선거에 성남시장으로 출마 하겠다며 열심히 뛰고 있는 윤창근 성남시의회 의장이다. 7)탁아소 운영 : 주민선교원(1984년) 어린이집이나 유아원이 한나절만 운영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던 때라서 맞벌이 부부는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곳이 없었다. 그래서 수도권의 빈민운동 활동가들 중심으로 탁아소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주민교회도 지하 교육관을 탁아소로 개조하여 주민선교원을 시작하였다. 탁아소는 북한의 탁아소를 연상해서 이름을 선교원이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빨갱이 교회로 매도당하던 때여서 명칭 하나에도 신경 써야 했다. 이 무렵 성남 주민교회와 상대원 분도수녀원의 분도유아원, 은행동 메리놀공동체의 하늘어린이집 등 세 곳과 서울 여러 곳에서도 탁아소를 운영하였다. 이후 지역탁아소운동연합회를 조직해서 연대활동을 하였다. 8)성남인력센터와 건설일용노동조합(1984년~1988년) 성남은 현장 노동자들이 유별나게 많은 도시였다. 1984년 이해학목사 주축으로 성직자‧교수‧지역활동가 등이 참여하여 성남지역민주사회발전연구회를 만들고, 주민분과위‧노동분과위‧종교분과위‧문화분과위‧청년분과위를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그 중 한숙자는 청년, 이상락‧이현배는 주민분과위에서 활동하였고, 위원회 사업 중에는 성남지역 역사를 연구하는 스터디 모임이 있었다. 이때부터 광주대단지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성남시도 관심을 갖고 202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사건 5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의 명칭을 “8.10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으로 정하고 명칭 선포식까지 하였다. 성남 광주대단지사건은 직접 연루자인 이태영씨를 통해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건설현장 일용노동자였는데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사회 모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상락과 이태영의 주도로 수진동에 인력센터 사무실(1984.4~1985.2)을 열어, 일자리 연결이나 일을 못 나가는 사람들의 쉼터와 만남의 장소로 운영하였다. 성남인력센터는 약 1년 운영하다가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해 성남일용노동조합추진위원회와 복정동일용노조를 거쳐 전국적인 건설일용노동조합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복정동 도로변에는 일자리를 구하려고 매일 새벽수백 명의 건설일용노동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이 운신할 곳이 없어 당시 김병량시장에게 요청하여 공터에 컨테이너를 설치해 일용노동자 쉼터로 사용하였다. 쉼터 설치를 계기로 복정 일용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주민교회 활동가의 활약으로 건설노동자 지도자가 배출되었고, 복정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일용노조가 결성되는 역사를 만들었으며, 이태영씨는 초대 전국건설노동자연맹 위원장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건설노동운동의 지도자로 우뚝 성장하였다. 9)모란장 살리기 운동과 성남노점상연합회 결성(1985~89년) 모란장은 전국에서 가장 큰 5일 장이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모란장의 개고기 판매 등 비위생적인 모습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로 폐쇄하라는 정부 행정조치가 내려지면서 갑자기 시 공무원과 경찰 수 백 명이 출동하여 모란장을 찾은 상인들과 시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길을 막았었다. 주민교회는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역사적 의미가 크고 영세 상인들의 삶의 터전이요, 시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모란장 살리기 투쟁을 결정하였다. 투쟁방식은 비폭력 대응과 상인들의 조직화와 시민들의 반대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활동으로 정하고, 이해학목사는 CBS가 매일 특집방송을 하도록 하였으며, 이상락과 활동가들은 현장에서 상인들을 만나 조직적으로 싸우도록 도왔는데 이 싸움은 4주 만에 완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종합시장‧상대원시장‧단대시장‧중앙시장‧시청 앞 등의 노점상 조직화가 이루어져, 1986년 9월에 성남지역노점상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때 이상락은 직접 노점상을 하며 생계비를 마련했으며, 서울대 학생들을 이끌고 무료 치과진료와 한방진료를 진행하며 노점상연합회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김광수‧지관근‧ 임승철이 합류하여 실무자로 함께 활동하였다. 10)도시빈민선교협의회 창립(초대회장 이상락 선임,1985년) 1984년 이해학 목사의 권유로 이상락‧이현배‧한숙자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가 실시하는 활동가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1년간 혹독한 교육을 받았고, 이상락은 빈민선교, 이현배는 신협, 한숙자는 교회‧청년‧노동현장으로 역할을 분담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상락은 1985년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개신교와 가톨릭 활동가들과 연대하여 수도권 도시빈민지역을 다니면서 철거민ㆍ노점상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1) 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주민교회 주민교회가 주도하여 만든 YMCA‧건설일용노동자‧노점상‧철거민‧노동자‧종교인‧지역활동가 조직들은 87년 6월 항쟁의 근간이 되었다. 광역 대도시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청년‧학생‧노동자‧시민들이 참여한 운동으로 성남시는 민주화운동에 자랑스러운 도시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1987년 6‧10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지역 40만 여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5만 여명이 참여 한 성남은 민주헌법쟁취성남본부를 결성하여 이해학목사가 상임공동대표, 기독교‧천주교‧불교 등 3개 종단 성직자들과 교수 등이 공동대표, 이상락 집행위원장, 한숙자 사무국장 체제였으며, 당시 대학생 대표로 김태년 현 국회의원도 집행위원으로서 함께 6월 항쟁을 이끌었다. 6월 항쟁에 많은 청년‧노동자‧시민들이 희생되었지만, 노태우 민정당 대표로부터 6ㆍ29선언을 얻어 내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으며, 이후 노동자 대투쟁으로 발전하며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대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민주화운동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성남민주화운동사업회를 만들어 매년 6월 민주항쟁 기념행사를 비롯하여 각종 민주화운동 기념행사와 민주열사 추모행사, 민주시민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시키고 있다. 초대 이사장 이해학 목사, 현 이사장 이상락이며, 주민교회의 이 같은 활동은 나아가 이주노동자운동‧참교육운동‧통일운동 등 여러 다양한 부문으로 확장되었다. 12)1986년 하대원 철거 투쟁 1985년 9월 하대원동에는 집 없는 주민들 60가구 300여명이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었다. 성남시는 이곳의 주민들에게 당장 철거하라는 계고장 하나만 보내놓고는 며칠 후 아무런 대책도 없이 경찰과 용역 깡패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철거하고 있을 때, 우리 교인들이 나서서 대책 없는 철거 중지를 요구하며 함께 싸웠다. 결국 시가 거주민들에게 최소한의 이주비를 지급하고, 이사 할 곳을 마련할 때까지는 강제로 철거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주민 20여 명이 시장실 점거농성을 하였고, 철거현장 주민들은 인분을 비닐봉지에 담아 경찰과 철거반원들에게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어떤 주민은 인분을 자신의 머리에서부터 온 몸에 부으면서까지 저항하며 자기 보금자리를 지켜냈던 절실한 사건에 주민교회가 함께했던 일로서 그 때 만난 인연으로 아직도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있다. 13) 88ㆍ89 노동자대투쟁 지원과 블랙리스트 철폐운동 전개(김윤기열사‧최윤범열사 분신사건)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상대원 공단을 비롯하여 성남의 많은 사업장에서는 노동자 대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노조 결성 과정에서 사측과 공권력이 노동자들을 탄압할 때 주민교회에는 빨리 도와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고, 그 때마다 우리 교인들은 충돌 현장으로 달려가 함께 매도 맞아주고 싸워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임금투쟁을 벌이던 사업장의 노조위원장 2명이 분신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이해학 목사는 성남시장에게 중재 요청을 하여 사측으로 하여금 유가족들에게 원만한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경찰서장에게는 부상자 치료와 사과를 받아 내기도 하였다. 그러자 공안당국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성남과 인천 등의 각 사업장 사측에 보내서 이들의 취업을 막았는데 그 서류가 88년 상대원 고려피혁 투쟁 중에 노무담당 책상 서랍에서 발각되었다. 이 리스트에는 주민교회 교인 이상락 등 97명과 노동자들 포함 총 760명의 인적 사항이 적혀있었으며, 이 리스트로 주민교회 교인과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취업을 못하여 생계에 위협을 받았고, 국가기관의 지시에 의해 성남시내 중‧고등학교에서 주민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을 공개 조사하였고, 일요일이면 교회 입구를 지키며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일도 있었다. 이때 노동자 대투쟁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이상락과 한숙자는 공안당국에 수배되어 수 개월여 동안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주민교회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구하여 2010년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아내었다. 14)풀뿌리민주주의 운동 지방자치제 참여 이승만정권 때 시작된 지자체가 박정희정권에서 전면 중단 되었다가 30년 만인 1991년에 실시된 지방의원 선거에서 주민교회 교인처럼 빈민운동과 지역운동을 펼쳐 온 사람이 지방의회에 활동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기에 당연히 후보를 내야 한다는 교회와 지역사회의 요구로 이상락을 범시민후보로 성남시의원에 당선시켰다. 당시 시장은 정부가 임명한 인물이라 시의원을 우습게 여기던 시절이었기에 이상락의원은 ‘결산 검사위원 선임에 관한 조례 개정’ 활동을 시작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이며 시장과 맞서 외롭게 싸웠지만, 시사 월간지 ‘말’(1991년 10월호)에 시장의 독선과 의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방자치 발전의 방해 요소와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썼다가 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의회에서 6개월 만에 제명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분노한 시민 수 천 명이 모여 ‘이상락의원 제명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여는 등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끝내 의회에 다시 돌아가지는 못하였다. 5. 글을 정리하며 주민교회는 70~80년대 공권력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성남지역의 반민주 기득권 세력들은 이해학목사와 주민교회를 추방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데모도 했다. 그런 억압 속에서도 주민교회는 빈민선교‧민주화운동‧통일운동에 앞장 서 왔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풀뿌리민주주의운동‧생명운동‧교육‧지역복지운동 등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민주화운동 세력들의 정치권 진출과 괄목할만한 활동으로 시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주민생협 또한 주민교회라는 작은 단위를 넘어서서 성남지역과 이웃 용인시로 그 세가 계속 확장 되어 나가고 있다. 주민복지상담소‧한국참사랑복지회‧성남자활지원센터‧해맞이학교‧주민공부방으로 시작된 교육‧복지사업은 복지관과 어린이집, 전교조 지원, 교육감선거 지원 등으로 지속적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주민신협은 40년의 역사를 지닌 서민금융기관으로서 꾸준히 성장하여 왔다. 무엇보다 신협운동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건전하게 발전시켜 온 주민신협은 한국 신협의 모델이 되었다. 이는 주민교회 정신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주민교회의 선교는 교회의 틀 안에 묶어두지 않고 지역사회의 인재들을 발굴하고 참여시키며 그들과 함께 과감하게 지역사회로 나가거나 확장시켜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으로 대응하였으며, 때로 오해와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주민교회가 걸어 온 길이 옳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책임감을 갖고 분발한다면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폄하해도 주민교회는 참된 예수공동체로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이다. 또 특이할 점은 주민교회는 평신도 활동가들을 발굴하여 육성했다는 점이다. 혹자는 주민교회 교인은 신앙심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민교회는 사회운동을 주도하면서도 신앙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본다. 특히 80년대에는 매일 새벽기도회, 매년 신앙강좌‧제자훈련‧전교인여름수련회를 개최하였으며, 매주 금요철야기도회를 했고 작은 기도실에는 평상시에도 교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외국인노동자의집을 운영하면서는 10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교회에 상주하고 있으면서 교인들이 겪어야하는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교회 주변이 온통 쓰레기로 덮여있고 여기저기 가래침을 뱉어놓지 않나, 서로 싸움질을 하지 않나… 이런저런 사고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유골은 교회 창고에 20~30구 씩 쌓여있을 정도이니 이게 무슨 교회냐며 불만을 갖고 교회를 떠난 교인도 있었다. 김종태 열사가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분신 사망한 이후 주민교회는 청년회 주관으로 매년 김종태열사추모예배를 드렸는데 교회 강단에 열사의 영정사진을 올려놓고 국화꽃을 영정 앞에 올려놓는 것을 본 일부 교인들은 교회가 미신행위를 한다며 상처받고 떠나기도 했으니 주민교회는 교인이 늘어 날 틈이 없었다. 떠나는 교인들은 대개 헌금도 많이 내는 교인들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주민교회는 왜 일부 교인들을 떠나보내면서까지 김종태열사 추모제를 지속하고 이주민들을 돌보는가? 이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교회의 50년은 성경말씀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왔으며 끝없는 도전과 실험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민속찬양과 기도를 만들어 민속 악기를 연주하며 민속예배를 드리거나, 우리들의 삶이나 역사를 담은 내용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 해 보는 ‘주민연극제’ 같은 행사들은 우리가 앞으로도 꾸준히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50년을 살아오면서 기도하고 몸으로 행동하며 그동안 우리가 생산 해 냈던 것들 즉, 주민교회 표어‧공동체헌장‧신앙고백서‧공동체실천선언문 등을 한번 끄집어내서 이제는 수정하거나 보완 할 것은 없는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1년에 몇 번 씩이라도 전 교인이 함께 소리 내어 외쳐보거나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는지 살펴보는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오랜 세월 이야기한 생명공동체다. 어쩌면 우리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광주에 텃밭이 있는 주택을 사서 라쿰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기도 했으며, 장건ㆍ최병주 장로님 가족은 아파트의 한 공간에서 공동생활을 실천해 보기도 하였다. 몇 분들은 미국과 유럽의 여러 공동체를 탐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재건축하기 전에 교회 부동산을 처분하고 다른 곳으로 나가서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결의하고 준비 한 적도 있었으나 부동산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은 다시 이 자리에 재건축을 하게 된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일공동체‧두레마을‧생명누리공동체‧야마기시공동체 등 현재 우리 사회에 자생적으로 성장한 공동체들은 대체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와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제적공동체, 영적인 각성과 수행, 생명존중의 가치관에 더 치중하는 생태적 공동체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공동체 운동이 시민운동과 다른 점은 시민운동이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자본주의 시장의 비도덕성과 비윤리성을 감시하고 저항하는데 반해 공동체 운동은 대부분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시장 논리 밖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 작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주민교회가 처음부터 공동체 건설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해서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더라면 그 꿈은 이미 이루어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엄혹했던 시대는 주민교회로 하여금 모여서 한가롭게 공동체나 만들고 있게끔 그냥 두지 않았다. 예언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주민교회는 운명적으로 시대적 예언자이면서 파수꾼이자 진군하는 전위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정신과 상황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공동체생활을 준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한꺼번에 전 교인이 함께 가기는 어려울 테니 할 수 있는 교인들 몇 가정이라도 먼저 시작하고 점차적으로 확대 해 나가는 방법도 생각 해 봄 직하다. 공동체 마을 안에 예배당을 짓고 전 교인이 함께 드리는 예배를 꿈꿔본다. 이러한 평가 위에서 앞으로 주민교회 50년의 설계가 나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의 형식은 보완하거나 바꿀 것이 없는지,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지, 전도 사업은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 지역사회에서 주민교회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래서 50년 후가 되었을 때 주민교회의 상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번 창립기념강연회에서 강사는 그동안 밖에서 바라봤던 주민교회의 모습을 아주 명확하게 평가해 주었다. 아울러 주민교회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담당 해 줬으면 하는 바람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 신도회 별로 진지하게 토론을 진행하여 왔고 아주 많은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그 토론 내용 속에 주민교회 50년의 평가와 함께 앞으로의 50년에 대한 방향이 제시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것들을 잘 다듬어서 하나로 묶어내고 함께 공유하면서 실천 해 나가면 좋겠다. 덧니 : 앞에서 나열한 내용들은 주민교회 45년 교인 이상락이 직접 체험하고 고백한 신앙의 관점에서 정리를 해 본 내용으로, 발제자의 주관적 생각이 들어 갈수 밖에 없음에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더불어 주민교회의 50년사의 그 굴곡을 모두 담아 낼 수 있다는 욕심도 컸으며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한계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의 활동 내용을 정리 한 것 보다는 교회 밖의 활동내용에 너무 치우친 경향이 있던 점에 대해서도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발제자는 1977년 말부터 주민교회를 다닌 이후 지금까지 주민교회를 벗어 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발제자의 삶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여 깊은 애정과 노력으로 준비하였으니 글을 읽으시면서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역사도 함께 담긴 글로 여기주시고 너그러이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3차 발제에 대한 신도회별 토의 물음 1. 주민교회가 50년간 실행한 선교 활동에 대한 느낌은 어떤가요? 2. 앞으로도 지속하거나 다시 되살려야 할 선교는 어떤 것일까요? 3. 시행했던 선교 활동 중에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이고 중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4. 주민교회가 오랫동안 논의하고 준비했던 공동체마을 실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5. 현재 한국사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6. 202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7.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8. 주민교회의 향후 50년 선교과제를 구체적으로 제안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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