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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국제심포지움 주제강연-오늘의 세계와 평화의 신학[2006.05.12] 주민교회 (juminch)
2014년 03월 11일 10시 03분 00초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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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14년 03월 11일 10시 03분 00초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국제심포지움 주제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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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화’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신학적 성찰을 시도할 때마다, 성서의 두 구절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나는 이 두 구절이 ‘평화’에 대한 성찰이 피상적인 것이 되기 쉽고,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실제 삶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구절 중 첫째는 예레미야 8장에 있는데, 이 구절에서 예언자는 당대의 지도층에 대해 격렬하게(vehemently)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지도자들이 “그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피상적으로만) 치료해주면서 평화가 없는 때에도 ‘평화’, ‘평화로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렘8:11;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언자는 종교 지도자들도 비판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의 불안함을 누그러뜨리고 그들의 국가가 나아가는 멸망의 길을 은폐하려고 평화라는 말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 지도자들은 국가를 괴롭히는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현재 겪고 있는 징후들만을 다루는 고육책(苦肉策)만을 제안합니다.

두 번째 구절은 신약에서 나오는데, 이 구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 있을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서, 예루살렘(“평화의 도성”을 의미합니다) 도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말했습니다. “ 만약 너희가, 심지어 (바리새인인) 너희조차 오늘날 평화를 만드는 일에 대해 깨닫기만 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이제 평화를 만드는 그러한 일들은 너희 눈에 숨겨졌다.(눅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여기에 나타난 경고는 우리가 실제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고, 때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평화를 추구할 수는 있지만, ‘우리 시대의 평화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번 강연을 이 두 구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평화의 의미

(The meaning of peace in the Scriptures)



우리는 대개 ‘평화’라고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인 샬롬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샬롬은 단순히 갈등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행복(well-being)'의 상태, 또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대로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샬롬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 이해는 언제나 히브리 성서의 모든 종말론적(eschatological) 이미지에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샬롬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눕고,

표범이 어린 아이와 함께 누우며,

소와 사자, 그리고 여러 가축들이 함께 하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이끈다.“



“그들은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를 입히거나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이,

마치 바다가 물로 뒤덮이는 것과 같이

주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11:6, 9)



미가의 환상에서는,

“그들은 자기들의 칼을 부수어 쟁기의 날로 만들 것이고,

그 창을 부수어 낫을 만들 것이다.

(한) 나라는 (다른) 나라에 대하여 칼을 들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편히 쉴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다.“(미4:3-4)



좀더 자세히 보면, 이 친숙한 성서의 구절들은 샬롬과 관련하여 세 가지 부분을 강조합니다.

- 인간 존재 사이에, 그리고 인류와 자연 사이에 있는 모든 형태의 대립(enmity)과 소외를 극복함.

- 모든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평화롭게 앉아 쉴 수 있는 정의의 건설.

- 폭력의 두려움이 없게 함.



정의와 평화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논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이미 여러 차례 있었고, 1990년에는 여기 서울에서 개최된 JPIC 대회(정의와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전에 대한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한 집단이나 다른 집단을 공정하게 대하시를 거부하거나 다른 집단에 의해 한 집단이 지배되거나 억압받는 데에 까지 직접적으로 우리 세계의 국내적, 국제적 갈등을 추적할 수 있다. 부정의의 만연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문화적 영역까지 이르지만, 어쨌든 어떤 집단을 공정하게 대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갈등, 폭력 그리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전쟁에 대한 처방전(recipe)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대다수의 국내적 갈등과 중동, 전(前) 유고슬라비아와 북아일랜드 등지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우리가 잠재해 있는 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평화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입장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엄청난 사회,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절차에 있어서 사람들의 소외, 그리고 열강에 의한 다른 나라들의 경제, 문화적 지배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혼란하며 폭력에 휘둘리는(violence-ridden) 세계의 근본적 원인입니다.



평화의 수단으로서의 전쟁? (War as a means to peace?)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대략 6천2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중 대다수는 일반 시민이었는데, 광범위 공중 폭격, 질병, 기아, 그리고 집단 학살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핵무기를 사용한 결과로 또 다른 십만 내지 2십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들 또한 대부분 일반 시민들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안겨준 상처(trauma)가 그러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버리는 (최후의) 전쟁”으로서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들이 무력충돌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해결한다는 결단으로 세계 연합(United Nations)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 연합이 생겨난) 1945년 이후에, 150 차례가 넘는 전쟁이 발생했고, 이 전쟁들로 제 1차, 2차 세계대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불구가 되었으며, 난민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살인 기계의 효율성과 무기 생산, 판매 체계가 100배로 증가하면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위험해진 시계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전쟁들 중 어느 하나라도 자세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동일한 문제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전쟁이 한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경제적 통제와 착취, 정치 과정으로부터 사람들을 소외시키거나, 사회나 문화, 경제, 또는 종교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로부터 발생해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정의, 소외, 그리고 공포가 대부분의 갈등의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제대로) 다루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행복(well-being)’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만 치료하고는, 그들이 평화에 처하지 못했는데도 ‘평화로다’, ‘평화로다’라고 하지 말아라.”라고 예레미야는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만약 평화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소외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루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더욱 길게 전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한국에서 강연을 하고 있고, 평화를 위해서는 소외의 근본 원인을 다루어야 한다는 이 원리를 수십 년 동안 평화를 위한 자신들의 투쟁의 기본 원리로 해왔던 사람들의 집단 앞에서 강연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독재에 저항하는 데에 수많은 한국의 교회들과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참여와 정치 과정을 민주화하기 위한 투쟁, 그리고 국내의 압제하는 정치, 경제적인 힘들에 저항하는 데 대하여 기꺼이 그 대가를 치룰 수 있다는 의지는 세계의 여러 다른 지역에 살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우리 대부분에게 훌륭한 본보기와 귀감이 됩니다. 우리는 또한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가장 불화를 일으키는 몇몇 열강들에 대항하여 한반도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결심에서 보여지는 비전(vision)과 용기, 그리고 책임감(commitment)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이 강연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성서의 경고 중 두 번째 부분, 즉 우리가 “우리의 평화를 위해 이루어야 할 것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예수의 경고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한다면, 오늘날 국가 안에서와 국가 간에 평화와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우리의 시도에 있어서 우리가 처리해야하는 몇몇 문제들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몇 가지 문제들을 강조하려고 하며, 근본적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성찰해보려고 합니다.



갈등을 처리할 창조적 방법 모색

(Finding creative ways to deal with conflict.)



창세기의 첫 장은 하나님이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the image and likeness of God)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형상과 모양’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신학적 고찰과 논의의 주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의미는 확실히 인간이 스스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는 점은 성서 이야기로부터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가 또한 암시하는 바는 개별 인류와 인간 공동체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공동체가 동의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점과 한 인간이나 한 공통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공동체에는 ‘악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인간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이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사회, 경제, 정치 체계와 문화, 그리고 문명으로 발전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차이(divergences)와, 그 차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논쟁들이 우리의 존재의 본성으로 맞추어 집니다. 이를 우리는 개인 생활과 가정생활에서 경험하고 국내 업무와 국제 업무에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는 우리를 갈등으로 내모든 선택이 실제로 존재하는 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갈등을 다루느냐 입니다. 보통 초기 목축과 농경 생활 사이의 갈등의 패러다임으로 간주되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보는 것 같이, 한 선택이 폭력의 사용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카인은 자신이 그 분쟁을 해결할 수 있고 아벨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땅 속에 숨겨놓음으로써 분쟁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 아우의 생명에 대해 책임지도록 카인을 불렀습니다.(창4장) 우리는 분쟁을 낳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한 우리가 우리의 분쟁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합니다.

창세기 이야기가 곧 또 다른 갈등의 이야기로 전개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데, 이번에는 함께 머물고 있던 비옥한 가나안 땅의 사용을 둘러싸고 (이후에 아브라함이라 불리는) 아브람의 목동들과 그의 조카 롯의 목동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납니다. 목동들 사이에 분쟁의 조짐이 있음을 알게 되자, 아브람은 그의 조카 롯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나 나의 목동과 너의 목동들 사이에는 어떤 다툼도 있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까운 일가친척이기 때문이다. 네 앞에 온 땅이 있다. 이제 우리가 서로 헤어지자. 만약 네가 북쪽으로 가면, 나는 남쪽으로 갈 것이고, 만약 네가 남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창13장)”

여기에서 나의 의도는 위의 두 이야기의 세세한 것들을 알아보려는 게 아니라, 창세기의 이 옛 이야기가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불가피한 갈등을 처리하는 상이한 방식을 시도하고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인간 공동체로서 우리가 갈등의 두 상대자들을 포함하는 정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창조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찾지 못한다면 평화와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사실, 법률 체계, 국가의 통치 구조, 그리고 국제연합과 그 산하 기구와 같은 국제기관들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이고 협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방식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쟁을 해결하려고 폭력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모든 영역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문제를 일으키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분쟁을 폭력에 의존해 해결하는 방식 중 최근에 가장 명백한 사례는 이라크 침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과 국제 연합은 이라크 침공을 방대했는데, (UN 뮤가 감시단과 같이)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던 다른 수단들이 아직 완결되지 못했고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수단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폭력으로 돌진하려는 미국과 영국 측의 결정이 협상과 같은 국제적인 수단을 훼손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라크를 이전보다 더욱 혼란스럽고 위험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수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목숨을 잃고, 이라크 국내의 물리적, 사회적 기반시설들을 파괴하고, 수십억 달러를 낭비하고 난 후에, 이라크는 금방이라도 내전이 일어날 것만 같은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라크 전쟁과 전 세계의 다른 수많은 분쟁들 통하여 배우게 된 교훈은 확실합니다. 만약 평화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 갈등을 처리하는 대안적 방식을 세워야만 합니다. 성서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현실적이고 우리가 그러한 분쟁을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인간의 상상력과 지혜라는 내면적 자원들에 도달하도록 촉구합니다. 오늘날 화해의 기술,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적 방식, 평화 교육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많은 기관들이 있지만, (평화교육과 같은) 그러한 것들은 여전히 국가의 관심사에 있어서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평화 교육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에 사용되는 예산은 국가가 무장 강화와 전쟁을 위해 사용되는 예산의 0.001%조차 되지 않습니다.

G. 부시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전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말합니다. “오늘이라도 너희가 너희의 평화를 위해 이루어야 할 것들을 알기를 내가 얼마나 원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만 합니까?



전쟁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것

Making warfare both illegitimate and illegal.



위의 생각은 우리가 전쟁이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는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만연된 신념에 대하여 재검토하도록 합니다. 물론 분명히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또는 국민들의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해 군사적인 간섭이 불가피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상황이 21세기의 정황에서 전쟁의 문제를 더욱 열심히 보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역사가들은 이미 결론이 나버린 20세기는 전(全)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역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들은 또한 만약 갈등 관계에 있는 양 진영에 기술적으로 발달된 국가가 포함된 제 2차 세계 대전 규모의 거대한 갈등이 미래에 생긴다면,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일종의 기술의 발달은 상상도 못할 차원의 파괴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고해야 하는 전쟁과 관련된 세 가지 양상을 조사함으로써 평화의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전쟁이 초래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1. 전쟁을 ‘합법화된’ 폭력의 형태로 보는 것에 내재된 문제

The problem inherent in looking at war

as a 'legitimized' form of violence.



전쟁은 국가들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형태의 폭력도 갖지 못하는 합법성을 누립니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군인들은 강제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만약 필요하다면 자신의 임무의 일환으로써 목숨도 내놓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군인들이 전쟁을 초래한 원인과 전쟁에 대한 계속적인 합법화, 그리고 전쟁이 성공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동의하든지 안하든지에 관계없이 군인에게 기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불변한 채로 계속되어야만 합니까?



2.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한다는 신념에 내재된 문제

The problem inherent in the belief that there are 'just wars.'

전쟁과 연관된 두 번째 문제는 수세기에 걸쳐서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계속 발달해 왔다는 것입니다. 나의 의도는 이 이론은 상세하게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라, (황제들로부터 압력을 받았던) 중세 교회들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전쟁의 수행을 포함하려는 관점과 함께 발전시켰던 6 개의 기준을 언급하려는 것입니다. 처음 세 가지 조건은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과 관계되는데, 즉 ①전쟁은 합법적인 권위에 의해 구별되어야만 하고, ②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수행되어야만 하며, ③전쟁은 예를 들어, 정의로운 이유와 같이, 올바른 의도에 기초해 있어야만 합니다. 나머지 세 가지 조건은 전쟁 자체의 수행과 관련되는데, 즉 ④전쟁 수행에는 균형이 있어야만 하고, ⑤전쟁에 쓰이는 힘의 양에 있어서 절제(moderation)가 있어야만 하며, ⑥전쟁은 승리할 수 있다는 납득할 만한 기회가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최근에 『평화의 중추: 폭력과 전쟁의 때의 기독교 신앙 (Axis of Peace: Christian Faith in Times of Violence and War )』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서 나는 이 6가지 원리를 가지고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갈등을 살펴보았고, (미국과 영국에 의한) 이라크 침공은 6가지의 기준 중에서 단 하나도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국제 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라크 침공을 “부당할 뿐만 아니라 불법적”이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실제로 윤리적으로 ‘정의롭다’라고 할 만한 전쟁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며, 우리가 발전시켜왔던 살생 기계들의 관점에서, 비례와 절제를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전쟁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는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고, 전혀 무기도 들지 않은 시민들입니다. 그러므로 무력 개입이 예를 들어, 한 공동체가 대량 학살하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는 있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그 어떤 전쟁도 더 이상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어느 때이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실수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악을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폭력을 사용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단호합니다. 이렇게 폭력에 의해 내몰리는 세계에서는 기독교 복음의 주장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악은 선으로 극복하다.”



3. 전쟁과 평화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양자택일의 것으로 간주하는 문제 The problem of seeing warfare and pacifism

as ideological alternatives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 논의의 문제 중 하나는 전쟁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반대하고, 그 때문에 평화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과 그러한 평화주의적 입장을 비현실적이고, 심지어 낭만적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였습니다. 이러한 양극화로 많은 사람들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있어서 전쟁과 평화주의를 단순히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취해야만 하는 이러한 대안들 사이에는 수많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전쟁에서 평화로 옮기기 위하여 취해야 하는 세 가지 기제(mechanism)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갈등을 해결하려고 전쟁에 호소하는 것은 불법적일 뿐만 아니라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쟁 범죄”의 문제에 대하여 국제 사회 내에서의 동의를 얻어 내는 데에 성공했고, 그 점에서 무장하지 않고 전쟁의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과도하고, 장당하지 못하거나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국제 사법 재판에 회부합니다. 나는 우리가 전쟁 자체를 범죄라고 간주하고, 전쟁에 호소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재판에 회부해야 할 때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나는 우리가 현재 그러한 사고를 충족시킬 만한 수단과 판단 양식(modality)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최소한 국제적 차원에서 전쟁의 가해자를 밝혀내고,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기 위해 몇 가지 최근의 전쟁에 대하여 “심문회”를 열고, 전쟁 가해자들이 도덕적으로 세계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시민의 재판(People's Courts of Justice)”이 개최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갈등을 방지할 수 있는 좀더 효율적인 수단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는 잠재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영역을 확인하는 노력과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할 때부터 갈등을 처리하려는 노력, 그리고 불만을 일으키는 요소에 주목할 수 있는 기제(mechanism)와 그러한 불만 요소를 정당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려는 노력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일이지만, 만약 우리가 스스로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인다면, 국내적 차원에서,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그러한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차별 정책 시대가 끝나가면서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가 진실과 화해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국가가 유지된 가장 탁월한 사례입니다.



세 번째는 거대 다수의 사람들이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강력히 방지하는 인간 사회를 움직이도록 하는(mobilize) 모든 노력을 전면적으로 동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집, 그리고 자신의 생계를 잃음으로써 전쟁의 대가를 치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는 아무 잘못도 없이 난민이 되거나 망명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전쟁이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략적 군사 엘리트(the politicalor military elite)에 의해 발생했고,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단지 무기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사람이며,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도록 계약된 사람들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전쟁을 더욱 자세히 보면 전쟁은 이익이 되면서도 가장 극악한 산업이고 많은 국가 경제 정책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계속적인 무기 사용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만약 우리가 의지만 있다면, 이러한 산업들이 국가가 관심을 가지는 경제적 생활을 훼손하지 않고도 평화로운 목적으로 재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전쟁 중에도 반전(反戰) 운동과 반전 시위가 항상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전쟁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야기하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기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옹호자들이 되기 위해 대다수 사람들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것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은 절대 사람의 이름하에 자행되는 선택 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침묵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입니다.

반전(反戰) 또는 반-폭력 자체는 우리의 평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설립하는 것이 사람과 국가가 열정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우리의 평화를 만드는 것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폭력, 평화, 그리고 종교적 전통

Violence, Peace, and Religious Traditions.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공적인 장(場)에서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대한 종교 전통의 역할에 대해 부르짖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종교와 폭력은 매우 복잡한 주제입니다. 한편으로, 거의 모든 종교 전통은 근본적인 가치로서 평화와 화해를 가르치고 모든 형태의 폭력을 비난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 전통은 과거에나 오늘날에나 폭력에 깊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종교의 역사는 종교가 대학살, 십자군, 전쟁, 노예제도, 인종 차별 같은 것들에 의해 오점을 남겼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대부분 이슬람 사회 내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행위와 테러, 그리고 자살 폭탄에 대한 종교적 합법성(legitimacy)을 찾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반드시 숙지해야만 하는 네 가지 문제들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하여 모든 종교 전통을 괴롭히는 모호성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 성서, 특히 기독교인들이 소외 “구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으로 가득할 뿐 아니라, 폭력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때때로 구약은 백성들이 다른 나라를 상대하여 승리하도록 하는 “강력하고 힘센” 존재로 묘사합니다. 물론 구약에는 이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동정적인(compassionate) 이미지도 있고, 신약에서는 예수가 사랑과 비폭력의 대변자로 나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폭력과 강력한 정치적 세력과 결탁함으로써 오점을 남겼습니다. 구원의 신학 이론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독교의 이미지 중 몇 가지는 하나님을 거의 폭군(tyrant)으로 나타냅니다. 기독교의 선교와 복음전도(evangelism)에 대한 이해 중 어떤 것들에는 힘과 지배, 그리고 추방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구원, 그리고 선교 등의 이미지가 폭력과 추방으로 특징지어진다면 다른 공동체와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투쟁을 발전시킬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기독교 신학과 선교학(Missiology)을 진정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반영하도록 하는 관점에서 날카롭게 관찰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서를 단지 힐끗 보기만 해도 정의와 화해, 그리고 비폭력이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기초임을 알게 됩니다. ‘회개’와 ‘고백’ 그리고 ‘용서’라는 개념은 이 세 가지의 기초를 지탱하는 필수적이며 영적인 훈련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신앙의 개념들을 주로 개인 생활과 개인 상호간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사용해 왔습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비폭력과 같은 개념이 또한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의 통치라는 속박에서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이 이끌었던 비폭력 독립 운동을 위한 자신의 기본적인 영감 중에 하나를 (예수의 산상설교처럼) 산에서 설교할 수도 있을 만큼 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더 최근에는 회개, 고백, 용서와 진리, 그리고 화해와 같은 개념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을 다루는 법률 처리 과정에도 소개되었습니다. 과거의 잔학한 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진리와 화해의 방법론을 사용하는 데 대하여 모든 사람이 행복해 한 것은 아니지만, 남아프리카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들 중에 몇몇이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갈등과 폭력을 해결하는 데에 실제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세 번째로, 자신의 사역 기간에 예수가 자기 자신의 종교 전통의 개혁자로서 행동하시고, 사람들에게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지키고 성전이 진정으로 “모든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라고 외쳤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는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던 그레코-로마 문화의 다른 수많은 종교 전통들에 대한 논쟁에 치중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소위 “물질 숭배 종교(Religion of Mammon)”라 불릴 수 있는 그 한 종교만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 권력과 부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the Reign of God)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다시, 우리는 너무 자주 예수의 이 명령(injunction)을 근본적으로 개인의 영성의 문제로서 권력과 부에 대한 유혹에 저항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더 깊게 성찰해보면, 예수의 이 명령이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미묘하게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쟁은 경제적인 이유로 싸움이 시작되고 권력과 부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전쟁이 시작된다고 역사학자들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의 수많은 불균형, 그리고 더 가난한 국가에서 만연하는 질병과 기아, 영양부족과 (그로 인한) 사망은 (그 원인이) 직접적으로 더 부유한 국가들의 과도한 탐욕에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자원이 한계가 있고 우리가 만약 그 자원을 절제하며 사용하지 않고, 이 한정된 자원을 더욱 공정하게 분배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국가와 인간들이 물질(mammon)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이미 이 세계에 배어 있는 폭력의 중심에 잇는 영적인 불안입니다. 맘몬의 문화는 폭력의 문화를 낳습니다. 우리가 맘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평화도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대의 백성들이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시대의 백성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전혀 눈먼 상태였고, 스스로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번영이라는 미끼에 사로잡혀 백성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멀리 토라(Torah)의 가르침으로부터 빗나갔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사람이 다른 길로 떠난다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이 백성들은 나를 떠나

끊임없이 타락의 길로 떠나는가?

이 백성은 거짓을 강하게 붙들었으며,

다시 돌아오기를 거부했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며 귀 기울여 들었지만,

그들은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의 악함을 회개하지 않으며,

“내가 도대체 무엇을 행한 것인가!”라고 말한다. (렘 8:4-6)



계속 지속되는 평화는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그러한 (잘못된) 일들로부터 떠나는 것에 달려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피상적으로만 치료해 주고, 평화가 존재하지 않은 때에도 피상적으로 ‘평화로다’, ‘평화로다’라고 말하는 당시의 지도자들을 경멸한 것입니다. 상처 입은 이들이 누릴 진정한 평화는 그들이 토라가 요구하는 공의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달려있다고 예레미야는 확신했습니다.



네 번째로, 평화 또는 샬롬에 대한 성서의 비전은, 좀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포괄적(inclusive)이며 동시에 종합적(comprehensive)이라는 점이 매우 인상 깊습니다. 평화에 대한 성서의 비전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고, 또한 실제로 모든 피조물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 성서의 이러한 종말론적인 이미지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평화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원수들을 포함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이웃 나라들과의 평화와 관계됩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19장에서 그러한 비전에 대해 말하는데, 그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우해주시는 이스라엘의 적대국가들 또한 동등하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귀중하게 대우하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 날에 이집트에서 앗시리아까지 대로가 열릴 것이고, 앗시리아인들이 이집트로 오고, 이집트인들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앗시리아인들과 더불어 예배드릴 것이다. 그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앗시리아와 더불어 세 번째가 되어, 이 땅 가운데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며, 모든 주의 주님이 축복하며 말하기를, “내 백성 이집트와 내 손으로 지은 작품 앗시리아, 그리고 나의 상속자 이스라엘에 복이 있으라.”(사19:23-25)

이스라엘의 평화는 그 이웃 국가들과의 평화에 달려있는데, 이 메시지는 또한 현대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도 관계가 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미국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파괴함”으로써 미국이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을 유지하겠다는 현재 미국 행정부의 “테러와의 세계적 전쟁(Global War on Terror)” 전략에 매우 당혹감을 느낍니다. 오늘날조차, 그리고 이 세대에 조차 한 국가가 자국의 평화만을 위해 전 세계 평화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현재의 징후만을 처리하기보다 갈등과 테러에 내재된 원인을 처리할 필요성을 간과한다는 점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미국 행정부의 모습은 “평화를 위해 이루어야 할 것들”에 대하여 국가 지도자들이 얼마나 눈멀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손꼽히는 몇몇 용감한 교회 종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아직도 국내의 상처입은 사람들을 단지 피상적으로만 치료해 주면서, 그들을 치료하는 일을 피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아시아에서 교회들 간의 회의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지역 내에서 평화를 찾는 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리랑카 사람으로서, 나는 스리랑카 국가를 두 종족 공동체로 분열시키는 갈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내부 갈등은 양 진영이 약간의 지혜를 가지고도 미리 알아서 처리하고(anticipate), 예방하며, 해결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경우의 갈등입니다. 우리는 수세기 동안 공통의 역사를 공유하는 국가들인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주기적인 충돌과 전쟁에 대해서 알고,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관계, 그리고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국내적 갈등이 우리 아시아 대륙에서 평화를 탐구하는 것이 매우 절박한 과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모임으로써, 우리는 같은 동족이면서 분리되어있는 사람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국가의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연대를 호소합니다.



기독교 선교에 대한 재고(再考) Christian Mission Reconsidered



선교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the Beatitudes)의 관심사이기도 한데, 예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5:9)” 만약 이러한 생각(sentiment)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의 우리 기독교의 선교에 대하여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의 선교가 사람들과 국가의 삶에 치료를 베풀고 충만함(wholeness)을 베풀려고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그저 상상하는 상처가 아니라, 실제 상처를 다루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인간 생활에서의 상처는 모든 차원에서의 폭력의 문화에서, 인간과 국가의 삶을 분열시키는 지독한 부정의에서, 소수의 사람들의 과도한 탐욕에 의해 생겨나는 많은 사람들의 절망적인 가난, 그리고 우리 세계를 우리가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으로 만드는 오늘날의 수많은 갈등과 전쟁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임무 중 일부가 아닙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우리의 임무 자체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바로 평화를 이룩하는 일입니다. 성서가 “평화롭게 되는 것”, 또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가지는 것”,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의 명령으로서의 평화 이룩하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또한 중요합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책임감, 인적 자원과 재정적 자원, 전술과 계획, 제도 그리고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세계를 실제로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믿음과 용기, 그리고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일보다도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자신감과 정력(stamina),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평화를 옹호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반체제적 활동(counter cultural activity)이기 때문입니다. 평화 만들기는 맘몬으로 상징되는 문화의 모든 것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깊고 단호하게 복음의 메시지에 근거하는 영성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바로 예수의 팔복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요구하는 믿음, 희망과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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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동 교수(감리교신학대, 기독교윤리학)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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