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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
세탁부,
1861년,
49*32.5cm,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뉴욕주 버팔로
그림 출처 :
최영미,
화가의 우연한 시선,
2003년,
돌베개
어두운 하늘 사이로 푸른 하늘이 간간이 섞여 있는 날이다. 유럽은 화창한 날씨가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는
않다고 한다. 그래서 햇빛이 좋은 날이면 남녀노소 자유분방하게 일광욕을 즐기나보다. 강에서 빨래를 마친 한 세탁부 여성이 아이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산업혁명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던 19세기 중엽, 세계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향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었다. 자연적이지
않은 기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으로 인간의 의식과 사회 구조를 바꿔놓은 사건일 것이다. 아직은 상하수도 시설이 현대적이지
않은 시절의 파리, 한 여성 세탁부가 빨랫감을 들고 강에서 올라온다. 희뿌연 색과 회색이 뒤섞인 뒤편의 강은 온 세계의 낭만을 담고 흐르는 센
강이다. 그러나 강 건너편 허연 공장에서 뿜어내는 공해와 폐수, 그리고 가정의 생활하수를 받아내 흐르는 센 강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빨래를 마쳤음에도 세탁물은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
여인은 듬직한 체구에 굵직한 팔뚝을 지니고 있다. 노동으로 단련된 강하고 억센 팔이다. 웬만한 시련에는
끄떡하지 않을 강인함이 느껴진다. 이 세탁부는 한손으로는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세탁물을, 또 한손으로는 너무 어려서 홀로 둘 수 없어
일하는 강가에까지 데리고 다녀야 하는 아들을 잡아끌고 있다. 비록 엄마 손은 잡았지만 아들이 자기 힘으로 계단에 발을 올려놓는 모습은 나이에
비해 야무져 보인다.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이를 위한 장난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엄마가 빨래를 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아이가 들어다주는 것으로 노동에 지친 엄마를 돕고 있는 것일까? 고된 노동의 일상이지만 모자 간의 말없는 애틋함이 묻어난다.

특이한 점은 엄마나 아들이나 얼굴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눈, 코, 입 어떤 것도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지
않고, 얼굴의 윤곽선이 뭉개져 있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이 여인은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냥 여성 노동자, 세탁부일 뿐이다. 산업사회의 격랑에
떠밀려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새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 척박하고, 세상은 너무 냉혹했으며,
사회의 변화는 인간 의식의 변화보다 빨랐다. 그 속에서 개인은 점점 지워져갔다.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 1808~1879년)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의 격변기,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산업화가 급속하게 확산되던 19세기 중엽에, 지금으로 말하면 시사평론 화가로서
활동했다. 어려서부터 도시 빈민으로 살았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어서도 가난한 이들의 삶에 천착하며 정치,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던 도미에는
생활에서 엮어가는 가난한 이들의 일상을 담아내고자 했다. 사회과학이 논리와 이성으로 시대를 고발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면, 도미에는 그림과
감성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잇대어 있었다.
소수의 회사 경영인과 다수의 일반 월급쟁이 직원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격차가 심해질수록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다. 그 갈등의 양 만큼 사회는 불안해지고, 행복은
소수의 독과점 품목이 된다. 다수의 상대적 약자들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일(노동)이 즐거울 수 없다. 즐겁고 기쁜 일(노동)을
꿈꾸지만 그것은 단지 바람일 뿐 실제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랑스럽지 않고 낯설다, 소외(疏外)다. 소외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행복할 수 없으며,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유지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사회로부터 따돌림 당하던 세리 삭개오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 19:5). 그것이 삭개오 변화의 첫걸음이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이미 몸이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를 향해 주님은 크게 소리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요한 11:43). 죽음에서 부활하는 나사로의 기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만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될 수 있다. 산업사회를 넘어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더욱 얼굴이
지워지는 수많은 우리의 ‘세탁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얼굴을 되찾아주자. 주님이라면 분명 그리하셨을 것이다.
<성남주민교회
이훈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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