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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의 뿌리와 그 정신사의 맥 (박근원/기장회보 201508호) 주민교회 (juminch)
2015년 08월 20일 00시 00분 00초 547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의 뿌리와 그 정신사의 맥

 

 

박근원 박사

서울노회·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우리 교단의 정체성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분열되기 이전의 조선예수교장로회인가? 우리 ‘새 역사’의 출발은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조선예수교’가 아니다. 우리의 민초들이 만주에 흩어져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직접 복음의 씨앗을 가지고 와서 싹을 틔운 ‘소래교회’(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1898년 캐나다 선교사 마구례(Duncan MacRae)는 이 새싹을 키우려고 한국에 왔었다.

미국 쪽에서 내한한 선교사들도 이 ‘소래교회’를 끌어안고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시작했으나 그 뿌리와는 좀 다른 성격의 나무가 되어 자라고 있었다. 이런 긴장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개혁교회 뿌리의 회복을 전제로 한 새 역사의 선언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1953년 ‘호헌선언서’를 내용으로 한 우리 교단의 출발이었다.

우리 교단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개혁교회의 유산을 물려받은 장로교단으로서, 그 전통을 굳게 지켜 온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1953년, 당시 장로교단의 교권에 몰려 할 수 없이 새 교단으로 출범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교회 개혁의 계기로 삼았는데, 그 새 역사부터 우리의 개혁교회의 유전인자(DNA)가 표출된 셈이다. 제38회 호헌총회에서 선포한 소위 “호헌사”가 바로 그런 ‘개혁의 모티브’를 증거하고 있다.

 

(1)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 우리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 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4)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우리 교단의 지난 60년 역사를 돌아볼 때, 부단히 이 개혁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순례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정립된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한국교회 안팎에서 소위 ‘기장성’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교단의 바른 정체성은 이런 몇 구절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역사를 순례하면서, 그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 거기에 응답하여 자신을 “항상 개혁해 온 교단”이다. 이런 지난 60년의 몸부림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100주년을 향한 우리 교단의 미래에도 이런 순례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위의 ‘호헌선언서’의 항목은 여러 개의 조항이지만, 이것은 소위 바리새주의를 배격한 항목으로, 당시 장로교회의 변질된 독소를 지적한 것이다. 그 골자를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다. 1) 온갖 바리새주의의 극복(복음의 자유) 2) 장로교 전통의 회복(신앙양심의 자유), 3) 자립자조정신 함양(의존사상 배격), 4) 세계교회의 정신에 철저(에큐메니컬 교회의 개방성) 등이다. 이 내용을 아래에서 역사적으로 다시 한 번 살펴 가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 기장의 정신사의 맥이기도 하다.

 

 

우리는 역사를 순례하면서, 그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 거기에 응답하여 자신을 “항상 개혁해 온 교단”이다.

 

 

 

우리 교단의 신학사적인 맥

 

1) 4대 문서(1970-78): ‘하나님의 선교’ 신학

우리 교단이 새 역사 20주년을 전후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산발적이었으나 그 문서들이 총회에 수렴되었는데, 당시 총회 총무였던 이영민의 주도적인 역할이 감지되며, 그 신학의 핵은 그 당시 세계교회 신학의 주제였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었다.

‘4대 문서’란 Ⅰ. 신앙고백서(1972), Ⅱ. 선교정책(1973), Ⅲ. 사회선언지침(1971), Ⅳ. 교회교육정책과 지침서(1970)를 한 단원으로 묶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여러 차원의 발상이 응집된 교단 문서로서 당대 다른 어느 교단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교단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우리 교단 나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앙고백서”가 총회에서 채택되고 선언되기까지는 꽤 오랜 논의와 연구 과정을 거쳤다. 서남동 목사를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이 계속 이 일을 위해 씨름하는 중에, 특히 1967년에 제정 공포된 미국연합장로교의 ‘신앙고백서’는 큰 자극을 주었다. 바로 그해 1967년 제52회 우리 교단 총회는 드디어 ‘신조개정 위원회’(김재준, 김정준, 조향록, 전경연, 이장식 등)를 구성하고 여러 차례 연구협의회를 열었다.

그다음 해 총회에 이 연구위원회는 ‘신조에 관한 연구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신앙 고백의 본질을 검토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와 비판을 다루었다. 미국장로교의 자료를 반영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비판적인 연구를 수용한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 교단 총회는 새로운 신앙고백서 채택에는 아주 유보적이었다. 1971년 총회에 제출된 ‘신앙고백서’의 안을 1972년 제57회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는데, 그것을 ‘신앙고백서’가 아니고 ‘신앙고백 선언서’로 공포했다. 거기에서 ‘선언서’라는 꼬리표를 떼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더 걸렸다. 노회의 정식 수의를 거쳐서 1978년 제63회 총회에서 교단의 “신앙고백서”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장로교 전통에서는 미국장로교에 이어서 두 번째로 우리 교단의 “신앙고백서”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우리 교단의 “선교정책”은 소위 ‘4대 문서’ 중에 가장 늦게 채택된 문서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제 나온 문서들이 표방한 ‘선교’ 개념의 과격성을 교단의 저변에서는 미처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선교’란 흔히 ‘전도’와 같은 개념이었다. 전도를 통한 개인 구원, 교회개척, 교회성장 일변도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선교 이념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인 대안으로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세계교회의 신학과 선교운동의 전위로 등장했다.

 

이 새로운 선교이념을 우리 교단이 교회개혁의 모티브로 받아들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온 세계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진리가 되었지만, 그 당시로는 진취적이라는 우리 교단도 이 신학을 수용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이 ‘선교정책’은 당시 우리 교단 몸부림의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내용 자체도 지향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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