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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학 목사 관련 기사] “민주화는 김재규에게 빚 지고 있다”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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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14년 02월 25일 00시 00분 00초






“민주화는 김재규에게 빚 지고
있다”

10·26재평가 추진위 사람들이 말하는 ‘김재규
장군’



“탕!
탕!”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2분.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 터져나온 두발의 총성 뒤 잇따라 총성이 울렸고 역사의
한쪽이 넘어갔다.

영구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던 독재자 박정희는 그렇게 허무하게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70년전인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이었다.

10·26! 한국 현대사에서 평가를 두고 논란이 되는 사건은 수없이
많지만, 10·26과 그 거사의 주역인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한 애국군인’인가, ‘살인범’인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의사’와 ‘애국군인’이란 평가에서 ‘대통령 죽인 살인범’까지.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간극은 크기만
하다.

여기에 10·26은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였고, 김재규는 ‘의로운 군인’이라며 재평가와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지난 2000년 ‘10·26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아래 추진위)를 꾸렸다. 추진위엔 이돈명 변호사와 김승훈 신부,
청화스님, 김현 교무, 김상근 목사, 함세웅 신부, 강신옥 변호사 등 1970,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왔던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추진위는 결성선언문에서 “10·26의 은폐되고 왜곡된 사실을 밝혀 정의가 꽃피는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어 나가고자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김재규 명예회복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10·26을 ‘의거’라고 말한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협상 대표로 활약한 바 있는 김범태 추진위 집행위원장은 10·26이후 전두환 신군부 일당의 쿠데타 집권에 대해 “군사쿠데타의 원흉인
박정희로부터 터득했던 정권 탈취 기술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김재규를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처형한 전두환
일당이 오히려 내란죄로 단죄 받은 사실에 근거해 10·26은 재조명돼야 함을 강조했다.

과연 어떤 근거로 이들은 ‘김재규 장군의
명예회복’을 호소하는 것일까.

“10·26은 부마사태 등 조국의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사실 김재규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은 1980년 초부터 시작됐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등 종교단체는 물론이고 재야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지학순 주교,
강희남 목사, 함세웅 신부, 박현채 교수, 고은 시인 등이 김재규 구명운동에 나섰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당시 “10·26은
부마사태 등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민중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일어났다”면서 “오늘날 (1980년3월) 거론되는 민주화 논의는 10·26사태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 역설했다.

윤 전 대통령은 “민주화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에게 빚을 지고 있다”면서 “그 빚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유신체제의 특권을 향유했고 영원히 향유코자하는 사람일 것”이라 덧붙였다.

하지만 구명운동은 전두환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각본에 따른 형식적 재판’으로 효력없이 끝났다. 김재규는 전두환 신군부의 살육에 맞선 광주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숨죽였던 명예회복 활동은 1989년 광주전남 민주화운동가들의 모임인
‘송죽회’가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를 세우면서 표면에 드러났다.

김범태 집행위원장은 “1988년 8월 송죽회에서 김재규 장군을
의사로 추대하고 추모비를 건립키로 했다”며 모임 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그때만 해도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추모비 건립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김 집행위원장은 광주전남에서 김재규 추모사업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79년까지는 영호남 대립구도에서 유신독재가 자행됐습니다. 그런 독재자를 제거하는 데 영남인(김재규는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음)이, 더구나 같은 동향인이 앞장섰거든요. 아직도 수구세력들은 김 장군을 파렴치범으로 몰고 있는데, 재평가 작업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 뒤 송죽회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김재규 장군 추모행사’를 지내왔다.

이후 10·26당시
구명운동에 참여했던 민주화운동 원로들과 의논해 “김재규 장군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을 더 이상 미뤄선 안된다”고 판단해 추진위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김 집행위원장은 “평가는 어차피 국민들이 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10·26의 진상과 김재규 장군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온전히 알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10·26처럼 독재자 개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독재청산이 가능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김 집행위원장은 “유신을 겪어보지 않은 요즘 세대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며 말했다.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땐 역사적 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세력은 10·26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요. 사실 유신시대엔 사람들이 통치자의 이름 석자 함부로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 됐습니다. 그런 시절에 그 독재자의 충복이 국민을 위해
총질을 했다는 건 대단히 엄청난 사건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를 민주인사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데, 오히려 그런
지위에 있던 사람이 그 일을 한 걸 더 높게 평가해야 하는 겁니다.”

김 집행위원장은 “(김재규 장군이) 생전에 휘호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이란 글씨를 자주 썼다”면서 “단순히 통치권자를 보필했고, 유신에 조금 협력했다는 사실만 갖고 민주화인사가 아니라고 보는 건
적절치 않다”고 단언했다.

“지금은 김재규 장군의 거사로 앞당겨진 민주주의로 사람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지만, 그시절은 민주나
통일, 자유라는 말을 꺼내기도 힘든 때였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무너지지 않았으면 야당대표 박근혜도
없다”


김 집행위원장은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는 결국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재평가와 맞물려 있기에 “어렵지만 오히려 거기에 답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박근혜가 제1야당의
대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역설이지만 김재규 장군에 의해 유신독재가 무너졌기 때문이거든요. 민주화가 진전됐기에 박근혜도 제1야당 대표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유신독재 체제가 계속됐다면 오늘날의 의회민주주의도 없을 겁니다.”

김 집행위원장의 ‘김재규 장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이어졌다. 그는 “전두환이 집권하고 나서 김재규 장군의 치부를 찾아내려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드러난 게 없다”면서 “이건 김 장군이
얼마나 청렴했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이라 강조했다.

결국 10·26은 “김재규 장군이 장준하 선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을 정도로 민주주의에 대한 일관된 생각과 삶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 일”이고 “결코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아니 중앙정보부장이나 되는 사람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였다면 더 치밀한 준비를 했겠죠. 김재규
장군은 정권욕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결단한 겁니다. 친구나 선배를 죽인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10·26은 민주주의 회복과 자유를
찾아 국민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는 일관된 철학, 국민을 향한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같은 사실이 있기에 당시
김재규의 변호인들은 10·26은 내란목적살인이나 단순 살인이 아니라 “민주회복을 위한 응급조치로 적법성이 있는 저항권이었다는 법리를 폈다”는
얘기다.

김 집행위원장은 대법원 판결에서 다수 의견이 김재규 개인의 야심 때문에 국가원수를 죽였다고 몰아갔지만, 단순 살인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도 엄연히 존재했음을 강조했다.

“보수적이랄 수 있는 대법관들조차 소수의견이긴 하지만 김재규 장군의 거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다 전두환 일당에게 쫓겨났고요. 오늘의 상황에서 이 문제를 다시 봐야
합니다.”

‘정의의 편에 협력할 군인’이었던 김재규
장군


김재규가 유신에 반대했던 민주화운동가들에게 호의적이었고, 때론
은밀하게 뒤에서 도왔다는 얘기는 1970년대를 살아왔던 인사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성남주민교회를 세운 이해학 목사도 그 중 한사람이다.


이해학 목사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과 함께 안양교도소에 갇혀 있던 중 ‘군사정권 극복’의 방안에 대해
토론했다고 말한다.

이 목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시민운동이나 4·19같은 혁명만이 길”이라 한데 비해 장준하 선생은 “군밖에
없다”고 단언했단다. “군부를 청산하고 민정이양을 확실하게 할 애국군인밖에 없다”는 거였다.

군을 민주화의 도구로 쓸 생각을 하는
것에 실망해 있는 이 목사에게, 장 선생은 “정의의 편에 협력할 군인도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수감 생활을 하던 1974년 9월
어느 날 장준하 선생이 너무 침통해 했다. 며칠 뒤 이 목사가 무슨 일로 그렇게 힘들어 했냐고 묻자, 장 선생은 “그 사람이 배신을 했어.
장관이 그렇게 좋은가”하고 탄식했다는 것이다.

이 목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때 장관이 된 사람은 바로 김재규였다. 건설부
장관에 임명된 거였다. 이 목사는 장준하 선생이 말했던 ‘애국군인’이 바로 김재규였다고 확신한다. 이후 김재규는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1975년
8월17일)한 뒤, 그 유가족들을 남몰래 도왔다.

그렇기에 이 목사는 ‘김재규는 미국의 앞잡이였다’였다는 식의 분석에 대해서도
“성급한 판단”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김재규 장군은 최소한 장준하 선생과의 약속을 뒤늦게라도 지켜내는 민주혁명의 거장이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김재규 장군이 서슬퍼런 시절, 보안사사령관이나 중앙정보부 차장으로서 장 선생 가족을 도우려했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일”이라며 조속한 명예회복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젠 묻힌 역사를 바로잡고 김재규
장군의 명예를 회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니 그때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