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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위기의 현실 및 반테러 전쟁에 대한 비판적 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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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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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김은규 집사가 퍼온 글 ***************
다음은 "전쟁위기와 평화운동"이란 포럼에서 정원범 교수(대전신학대학교 교수)가 발표한 "전쟁
위기의 현실 및 반테러 전쟁에 대한 비판적 진단"이라는 논문의 일부입니다.
반테러 전쟁에 대한 기독교윤리학적 진단
1. 평화주의
데오도시우스 치하에서 기독교가 합법화되고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국교화되기 전 첫 3세기 동안 교회의
지배적인 견해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하는 '기독교 평화주의'였다. 즉 폭력적인 강압의 사용을 언제나 악으로 간주하며 필요악으로서조차도 전쟁을
거부하는 입장을 말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무력을 사용하거나 군대의 일원이 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평화주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군인들의 잔인한 박해와 황제 숭배의 문제 등이 배경에 있지만, 근본적으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랑과 평화의 복음이라고 생각했던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폭력과 전쟁에 참여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었다.
2. 정당전쟁론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정당전쟁론의 기독교적인 입장을 처음으로 제시한 신학자들은 4세기 말의 암브로스와 5세기 초의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정당전쟁론은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정통교회, 주류개신교회 등 기독교 대다수의 유력한 교파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서 수백년 동안 기독교적 판단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졌던 이론이다. 이 이론과 관련하여 자주 잊혀지는 사실은 이것이 전쟁보다는
평화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이론은 물론 전쟁의 법칙들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은 제한되어야 하고 통제 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당전쟁론자들은 대체로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기 위한 조건으로 7가지의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로, 최후의 수단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모든 합리적인 시도들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경우에만 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 수행될 수 있다.
둘째로, 정당한 이유이다. 싸우는 목표가 정당해야 한다. 즉 전쟁이 파괴의
위협이나 불의의 발생을 막으려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목적이나 안정된 질서를 지키기 위해 수행될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셋째로, 올바른 태도이다. 전쟁은 올바른 태도로 수행되어야 한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정의의 회복이어야지 분노나
보복적 태도이어서는 안된다. 넷째는 합법적 권위에 의한 사전 선전포고이다. 전쟁은 합법적인 권위에 의해서 명백하게 선포되어질 때 정당화될 수
있다.
그외 '전쟁에서의 성공 가능성', 전쟁으로 기대되는 이익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킴으로서 초래되는 악을 훨씬 능가해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여 비전투원에 대한 폭격을 금지해야 한다는 '비전투원 면제의 원칙'이 있다.
기독교
평화운동의 신학적 근거
잔혹한 9.11 테러와 같은 폭력과 테러가 점점 더 극심해지는 지구촌 시대에, 그와 같은 테러 문제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폭력과 전쟁에 대한 참된 대안은 보복이 아니다. 여기에는 평화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 속에는 평화 운동의
전통이 흘러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폭력과 전쟁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왜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기독교인들이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주역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1. 기독론적 근거
기독교인들에게 행위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고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가를 보여주신 존재이다. 기독교인이란 바로 이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에 순종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야 한다.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보복의 길이 아니었고, 폭력의 길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인들 역시 보복과 폭력의 길을
걸어가서는 안된다.
2. 교회론적 근거
본 회퍼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세우신 곳이 교회이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존재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요더(J. H. Yoder) 역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갈 독특한 공동체를 세우셨는데, 그 곳이 바로 교회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교회 공동체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 즉 비폭력, 평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3. 종말론적 근거
틸리케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두 시대의 시민으로서 살아간다. 즉 기독교인들은 옛 시대의 시민으로서, 동시에 새 시대의 시민으로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신 것처럼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옛 시대에 대하여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 속에 있다. 기독교인들이 옛 시대에 대하여 연속적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들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결혼하며, 세상의 질서와 권세자들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옛 시대에 대하여
불연속적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가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 수 없다.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이제는
이 세상에 속한 가치관, 즉 폭력과 보복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 즉 사랑과 평화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이러한 종말론적 실존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인 폭력과 보복의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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