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실린 날 : 2002년 7월
5일우리가 박정희기념관 건립 반대운동을 하는 이유
이해학 목사가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연대모임 상임대표로 활동 하고
있는데 의문을 제기하신 분에게 답변을 찾다가 역사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원의 글을 빌려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또 하나의 역사왜곡, 박정희 기념관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두 가지가 잘못된 박정희 기념사업
마침내 서울시는 지난 9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추진하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터를 제공하기로 협약했다. 서울시가
박정희기념사업회와 체결한 협약서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산26번지 상암택지개발사업지구 제4근린공원 내에 "공공도서관 및 전시장,
기타 부대시설"로 약 650평의 건축면적을 제공하기로 했다. 서울시의 역사의 반역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김대중정부는 700억 원이
소요되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에 200억원을 국고 지원하기로 했으며, 정기국회를 통해 이를 의결해 예산을 집행 중이다. 추가로 필요한
500억 원을 조성하기 위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박정희기념사업회의 국민모금을 허락했다. 그리고 박정희 기념관을 지을 터를 무상 제공할 것을
의결하고 이 문제를 서울시에 넘겼다. 그 결과 서울시는 숱한 시민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옆의 빈민촌을 철거하고 그곳에
박정희 기념관 터를 마련했다.
원래 서울시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치자 기념관 터는 제공할 의사는
없으며, 대신 (박정희)도서관을 짓는다면 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연막작전을 피웠다. 그러나 9월의 협약서에 따르면 서울시가 제공하는 터에 세워질
건축물의 명칭은 박정희기념사업회가 정할 수 있다고 밝혀 사실상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승인했다.
박정희 기념관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내력이야 어떠하든, 2002년 월드컵 관광객에겐 축구경기 외에 또 하나 눈요기감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처럼 박정희 기념관은
역사명소이자 관광지로 자리잡게 될 것인가? 박정희 기념관은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단언컨대 박정희 기념관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결코 추진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박정희는 우리가 기념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정희는 21세기로 나아가면서 우리가 청산해야
할 20세기의 낡은 유산이다. 박정희 일생과 삶의 방식 그리고 그가 현대사에 끼친 악영향을 보자면 박정희는 역사의 '반면교사'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박정희가 우리 역사에 끼친 부정적 영향을 우리가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과 다름없다. 국민 대다수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국고를 지원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어떤 형식이든 박정희 기념관 자체가 거부되어야 한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이 부당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사업을 추진하는 동기가 대단히 불순할 뿐 아니라 역사를 또 한번 왜곡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라는 민간 기구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인데, 굳이 정부가 이 사업에
앞장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국민의 정부, 인권대통령이라 자처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스스로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을 맡아 이 일에 앞장 설만큼 어떤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일 현 정권이 박정희를 기념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반대급부를 노리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기만하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사태는 비관으로 흐르고 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에 정부가 나서고 야당이
지지하는 현재의 분위기를 볼 때 박정희 기념관은 예정대로 건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대다수 시민이 한결같이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만이 이
불행한 사업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 검토함으로써 박정희가 왜 기념 아닌 청산의 대상인지 명확하게
해명하고, 현재 진행되는 기념관 건립사업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널리 밝힐 필요가 있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논리들
박정희를 옹호하는 근거 가운데 크게 논란이 되거나 주요한 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박정희는 친일파라고 하지만 그 친일 행위는 미미하다. 그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것은 해방 직전
1,2년에 불과하며 실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참가한 적도 없다(어떤 이들은 이 시기 박정희는 광복군과 연결되어 독립운동을 모색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방 후 한 때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담했지만, 특무대에 체포된 후 박정희가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고백함으로써 군부 내
좌익세력을 발본색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박정희의 일생에서 친일 또는 좌익전력은 극히 일부분의 시기에 국한되며, 이후 그가 끼친 역사적
공로를 볼 때 사실 무시해도 무방하다.
2. 4.19 이후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민주당은 무능했다. 더욱이 혁신계 세력이 급진적인
통일운동을 전개해 적화통일의 위험마저 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회는 더욱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그 형식이야 어떠하든 '사회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3. 박정희 유신체제는 후진국(또는 제3세계) 근대화(혁명)의 한
유형으로 파악해야 한다. 후발국가에서 근대화를 빠르게 이룩하기 위해 지도자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비록 인권문제는 소홀했지만
박정희는 '빵 문제'를 해결하고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은 일종의 고도성장의 착수금을 확보하는 과정이었이며, 박정희의
이러한 정책 결단은 현실적이며 올바른 것이었다. 박정희 집권기는 '위대한 조국근대화의 시기'로 재조명해야 한다.
4. 역대 정권 가운데
박정희 정권만큼 민족주의적인 정권은 없었다. 박정희는 민족주체성과 민족정기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주한 미군 철수나 독자 핵
개발를 추진했다. 아마 박정희는 독자 핵 개발이 성공했으면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의 죽음을 당해 종신독재자의 오명을 써야
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상당 부분 기초적인 역사 사실을 왜곡하거나 그 근거가 대부분 박약하다. 이들은 박정희 집권기에 시행된 여러 정책을 그 전후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떼어내어 자의적으로 미화하고 있다. 심하게는 이들은 민주사회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가치관까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논리로
동원하기도 한다. 이제 이들의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 왜 우리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박정희 신화의 허구
박정희는 단순한 친일파가 아니다. 그는 제국 일본의 돌격대인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해, 일제가 망할 때까지 조국에 총부리를 겨눈 "최후의 제국군인"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그의 말을 빌리자면 "큰 칼을 차고 싶어"―스스로 혈서를 쓰고 일본제국 장교의 길을 택했다. 가난, 무지, 만용, 징병 등의 이유로
일본군에 들어간 것과 다른, 자발적 친일의 전형이라 하겠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1944년 만주군 제5관구 예하 보병 8단에
배속받은 박정희는 그곳에서 조선인·중국인 항일빨치산을 적으로 삼고 싸웠다. 그가 실제 전투에 참여해 몇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살상했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항일독립운동세력을 적으로 삼는 제국군인의 임무를 충실히 다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정희가 이 시기 광복군의 비밀조직과
연결되었다는 소문 또한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 그의 충성세력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해방 후 박정희는 변신을 거듭해 좌익계열에 몸을
담았다가 조직을 팔아 넘기는 대가로 구차한 생을 이어왔다. 일제시기 극우파시스트에서 해방 후 돌연하게 좌익으로 변신했다가 다시 극우로 변신한
박정희의 화려한 변절에는 어떠한 사상적 고뇌도 없었으며, 오로지 출세와 생존본능을 따르는 기회주의자의 표본이었다.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조국과 민족 그리고 사상과 양심마저 내던지며 변신을 거듭한 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그러기에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박정희만은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어느 독립운동가는 절규했다.
박정희는 5.16 쿠테타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으며 권력을
잡았고, 마침내 유신체제를 선포해 종신독재의 길로 나아갔다. 10월 유신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박정희가 남북통일을 악용해 영구집권을 꿈꾼 제2의
쿠테타였다.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국민들에게 통일의 환상을 불러일으킨 후 통일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유신을 선포했다. 그러나 10월
유신은 평화통일을 앞당기기는커녕 오히려 남북의 냉전구조만 강화했고, 총력안보란 구실 아래 유래 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유신체제는
1930년대 일본 파시즘의 지배원리와 '근대화론'을 접합시킨 '일본파시즘의 한국적 변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신(維新)이란 용어 자체가
일본의 메이지유신, 소와유신에서 따온 것이며, 유신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구조와 통치체제의 근본 원리 그리고 수많은 정책들이 일본 파시즘의
그것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실제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통해 우리 사회를 통치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병영국가로
재편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아의 확립 대신 국가(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을 오로지 요구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이어주는 명령계통의 국가기구와 어용단체만 존재했을 뿐,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가차없는 박해만 따를 뿐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시민'아닌 '재야'라는
독특한 저항진영이 형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4·19 이후 막 피어나던 우리의 시민사회는 태어나기도 전에 박정희 국가주의에 의해 태아살해된
것이다.
박정희가 걸어온 삶이 이렇듯 뚜렷하게 부정적이기에, 그의 추종자들조차 박정희의 공로로 드는 것은 오직 하나 경제성장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밑천으로 내세우는 대일청구권자금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자행한 수많은 범죄사실을 불과 몇 푼의 돈을 받는
대가로 눈감아 버린 것이었다. 허울좋은 '고도성장의 금자탑' 아래에는 남의 나라 독립전쟁에서 의미 없이 죽어갔거나 아직도 고엽제 휴유증에
시달리는 수만 명 베트남 참전용사의 비극과 베트남 민중의 한이 배여 있다. 박정희가 휘날린 조국근대화의 허황한 깃발에는 저임금 장시간 중노동에
항의하다 무참히 짓밟힌 노동자들의 피가 묻어 있다. 새마을운동의 노래가 높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빚더미에 눌린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화려한 도시의 그늘 아래 수 백만 도시빈민의 통곡이 넘쳐흐른 게 박정희 시대였다.
박정희 시대에는 도둑촌과 떡고물로 표현되는
부정부패가 보다 거대한 규모로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자리잡았다. 고질적인 정경유착과 재벌의 족벌 경영,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만성적인
외채경제는 박정희가 주조한 왜곡된 경제구조의 핵심이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 심지어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가 유보될 수 있다고 주장해, 인간을 오직 빵으로만 사는 동물적 존재로 돌려버렸다. 박정희가 민주화를
훼손시켰지만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좋다는 전도된 가치관에 다름 아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투쟁의 역사적 의미
박정희가 집권한 시대는 민족과 반민족, 민주와 독재, 그리고
통일과 반통일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치관이 투쟁하던 시대였다. 이 빛과 그림자의 투쟁에서 박정희는 언제나 반민족으로, 독재로 그리고
반통일의 화신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이 암흑의 지배 아래 수많은 친일잔재와 파쇼 세력이 기만적인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때로는 '박정희 신도'로
자처하면서 박쥐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박정희 집권기 구축된 권력집단이 자신의 기득권을 21세기까지 연장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상징화 작업이 바로 박정희 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은 자신의 허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보수세력을 끌어들이고자
이 기념사업에 적극 뛰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은 박정희 시기 그의 '공범'들과 박정희가 남겨놓은 관변 시스템에 유착한
세력 그리고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현 집권층의 권력욕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 엉키어 진행되는 추악한 권력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인권대통령으로 자처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이 사업에 적극 나서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가해한 박정희를 "이미 용서"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지나
개인의 자격에서 가능할 뿐이다. 문제는 박정희는 김대중 대통령의 '개인적 박해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한 시대 국민을 볼모로
삼은 역사의 죄인이랄 수 있다. 이런 박정희를 김대중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역사와 국민을 대표해 임의로 용서하고 게다가 기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속에 국민의 혈세 200억원을 박정희 기념사업에 바치는 것은 이만저만 월권이 아니다. 알량한 정권 재창출을 위해
한편으로 박정희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가해자를 기념하는 이 엄청난 역사의 기만을 어찌 두고만 볼
것인가.
박정희는 결코 기념할 대상이 아니다.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독재로 이어진 오욕의 20세기를 극복하고 21세기 민족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반드시 극복 청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더욱이 박정희는 2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면서 각종 국가기구와 관변단체를 통해 이른바 박정희
이데올로기라는 파쇼적 가치관을 국민 속에 감염시켰다. 이제는 올바른 역사 반성을 통해 다시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우리의 가치관을
바로잡는 것이 시급하다. 지금은 박정희 기념사업이 아니라 박정희 청산사업이 시작될 때이다. 우리가 한 시대의 역사를 바르게 규정하지 못함으로써
전도된 가치관이 횡행하게 되면 언제든지 제2, 제3의 박정희 기념사업과 그의 후예들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