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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신학] 민중과 함께 하는 교회를 찾아서/성남주님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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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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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연구소, <민중과 신학> 제4호, 2000년
겨울호민중과 함께 하는 교회를 찾아서
생명을 살리는
북소리 -성남 주민교회(담임목사 이해학)를
찾아서-
박 은 자 * 이 글을 쓴 작가 박은자 님은
순천향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크리스챤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제20회 크리스챤신인문예상 작품공모에서 장편동화 {너를 만나서 정말 기뻐}가
당선되었고, 저서로 신앙수기 {쉿! 어쩌면 예수님일지 몰라}(1997)와 그림 동화집 {풀이 된 흑장미}(2000)가 있습니다.
주민교회의 이해학 목사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성남의 지리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온양까지 돌아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기에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자꾸만 정체되었다. 결국 7시
30분이 막차인 고속버스를 탈 시간은 이미 넘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주민교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고 권하시던 목사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목사님의 삶이 보다 구체적으로 내 가슴에 다가올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사실 오전 10에 도착해서 오후 7시가 넘도록 이해학 목사님과 종일을 함께 보냈건만 주일이었던 탓에 온전하게
할애된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다. 완행버스 역시 막차가 8시 30분에 있었기 때문에 설마 그 차는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택시는 길
한가운데 갇혀서 꼼짝을 못했다. 자꾸 시계를 보는 나를 눈치챘던 것일까? 택시기사가 말했다."성남에 사시는 분이 아닌가봐요." ". . . . . ." "오늘이 모란장날이라
그래요." 순간 나는 짧게 탄성을 질렀다. "모란장날이라고요? 아, 그렇군요. 여기가 성남이지요. 텔레비전과 책에서만 모란장을
보았어요. 모란장에 꼭 한번 오고 싶었지요." "맞아요. 누구나 한번쯤은 구경하고 싶은 곳이지요. 하지만 모란장만 성남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 모란장 말고 또 뭐가 있지요?" "성남에는 사람이 있어요." 택시기사의 말에 픽 웃고 말았다.
"성남에만 사람이 있나요? 어디나 사람은 많지요. 또 사람만 많이 있나요? 저렇게 차도 넘쳐나지요." 마지막 완행버스도 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불안해졌다. "저렇게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 말고 진짜 사람이 있어요.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운전기사의 말은 꽤 흥미로웠다. 방금 전 이해학 목사님을 만나고 온 감동이 아직 가슴에 그대로 있어서 벅찬데 도대체 성남에 또
누가 있다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말씀해 보세요. 성남에 사시는 분을 인터뷰하고 가는 길인데 기사분이 말씀하시는 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기자이신가요?" "아뇨. 글쓰는 사람이에요. 동화를 쓰기도 하고, 오늘처럼 누군가를 만난 탐방기를
써요." "그럼 제가 말씀드리는 분도 한번 만나보세요. 모란장은 몰라도 그 분은 아셔야만 해요." 성남에 대통령 출마자라도 있는
것일까? 택시기사의 진지한 말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말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성남시청 옆에 주민교회라고
있어요. 그 분은 주민교회 목사님이신데요." "뭐라고요? 주민교회라고요?" "주민교회를 아세요?" 놀라서 묻는 택시기사의 말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제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꼭 주민교회에 나갈 생각입니다." "그래요? 주민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훌륭하신가요?" 택시기사는 거침없이, 그러나 참으로 경쾌하게 대답을 했다. "훌륭하시지요. 아니 훌륭하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중국에서 넘어오는 교포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갈 곳이 없으면 주민교회를 찾아가요. 그러면 주민교회는 그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줘요." "그것뿐인가요?" "아니지요. 그것뿐이라면 성남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지요. 그런데,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아쉽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내리는 나를 운전기사가 불렀다. 그러나
거스름돈을 받고서도 나는 얼른 터미널로 뛰어들어 갈 수가 없었다. 어지럽도록 달려가는 차들의 경적과 아주 많은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완행버스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서도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가 성남시를 마악 벗어날 즈음 어둠이 땅 가까이 내렸다. 그랬다. 어둠이 내린 땅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서 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둥, 그의 힘찬 북소리에 사람들이 잠을 깨었다. 사람들이
그와 함께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북채를 든 힘찬 손들이 어둠을 갈라내고 있었다. 그랬다. 처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이윽고 그것이 내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그랬다. 그의 북소리에 나도 북채를 찾아들고
있었다. 함께 북을 치리라. 힘껏 치리라. 둥 둥 둥 둥 둥!이 땅이 오랜
시간 군부의 독재에 얼어가고 있을 때, 그리고 이 땅의 많은 민중들이 누리탱탱한 얼굴로 병들어 가고 있을 때, 젊은 이해학 전도사는 박형규
목사님이 위원장으로 있는 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부터 지역사회의학(Community Medicine)을 통한 주민조직운동을 전개하여 새로운 선교를
시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성남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이해학 전도사의 꿈을 위험하게 여긴 사람들로 인해 좌절을 당한다. 날이 갈수록 실망과 좌절을
거듭했건만 이해학 전도사는 자신이 스스로 짊어지기를 자청했던 십자가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이해학 전도사는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뛰어놀기
시작했다. 구슬치기를 하면 주머니 가득했던 구슬을 다 잃고 말았던 이해학 전도사에게 아이들이 60여 명 몰려들었다. 이해학 전도사는 비로소
아이들과 함께 참다운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어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과 함께 폐품을 수집해서 독서실을 꾸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토론을 했다. 아마도 그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요나의 이야기나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지금은 어른이
된 그들의 가슴에 아직도 살아 있으리라. 아이들의 부모나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 거적대기 쳐진 루삥집을 드나드는 동안 이해학 전도사는
참담한 현실에 목을 놓아 운다. 멋대로 얽어 맨 흉하기가 이를 데 없는 루삥집보다도 사람들은 더 복잡한 경제적 빈곤과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루삥집의 형태는 그래도 나았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 병원에 가본 적이 없어서 어디가 아픈 지도 모르고 앓고있는
사람들, 멀건 강냉이 죽 조차 먹을 수 없는 사람들과 산후에 먹을 것이 없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 아낙네들이 골목골목에서 기어나왔다. 이해학
전도사는 다시 한번 좌절에 빠졌다. 그리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교회운동을 통해 이 땅의 민중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자신의
패기와 이론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어려웠다. 그들은 생존의 위협조차 느끼지 못했고,
누군가 그들의 짐을 나누어지지 않으면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이해학 전도사는 그런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리라는 참으로 비장한 희망을 품었다. 1973년 3월 1일, 민족의 항일 운동이 폭발한 날, 이해학 전도사는 열 다섯
명의 성인들과 함께 주민교회를 시작한다. 이해학 전도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당장의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일도 시급한
일이었고, 실패만 거듭해서 대인 공포증을 앓고있는 사람의 처지도 말할 수 없이 딱했다. 거듭 실패하는 사람들은 우선 구조적인 악을 이해하지
못했다. 실패가 자신의 잘못이나 운명으로 받아들이기가 일쑤였다. 자신감을 회복시키거나 새로운 일거리에 대한 희망을 북돋우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포기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찾아가 사랑을 전했다. 결국 사랑 앞에 사람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너진
사람들이 이웃과 아픔을 나누는 열정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었다. 한 사람의 변화는 그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결과를 수반한다는 깨달음은 이해학
전도사를 참으로 숙연케 만들었다. 1973년 12월 25일, 주민교회의 첫 번째 성탄절 날, 이해학 전도사는 청년들과 함께 오늘의 역사
속에 오실 예수님이 누우실 구유가 어딘가를 밤새도록 토의했다. 모두들 김포국제공항이라고 결론지었다. 왜냐하면 김포공항은 김대중 씨 납치사건 후에
당시 김종필 총리가 일본에 가 사죄한 굴욕의 통로이며, 미국의 외채가 일본으로 그 축을 옮기고 있는 외환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김포공항은 매춘관광객의 통로로서 민족의 정기를 위태롭게 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어린 교인들이 택시에 나눠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예배가
시작된 지 십 분도 채 못 되어서 경찰이 포위하였고, 영등포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경찰은 어린 학생들까지 두들겨 패면서 이해학 전도사가
빨갱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은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울부짖었다. 어린 학생들은 참으로 큰 믿음의 용사들이었다. 이해학 전도사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시킨다는 것은 오만이라고. 이들 속에 묻힌 믿음의 보화들을 함께 발굴해 가는 것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으면서 회색빛이었던 성남의 도시가 점점 밝은 빛으로 다가오는 것을 이해학 전도사는 뜨거운 가슴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련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1973년 말 장준하 선생님은 유신헌법 개정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민주화의 봄이 곧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되었다. 누구든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비방하고 그 개정과 폐지를 선동하는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배포하는 자들에게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하루 아침에 살벌해진 세상은 꽁꽁 얼어가기만 했다. 이해학 전도사는 조용하게 목회만 하면서 살 수가 없었다.
역사가 부르는데 피할 수가 없었다. 만약 피한다면 그것은 이미 짠 맛을 잃은 소금이었다. 피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팡이를 써서라도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1974년 1월 17일 새벽, 이해학 전도사는 양심선언문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여'를
아내에게 맡기고 집을 나섰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악의 세계가
스스로 물러나고 오는 것이 아니고 새 질서의 힘이 일어남으로 악이 제거되어 진다고 봅니다. 어둠에 빛이 일어남으로 어둠이 쫓겨가는 것 같이
말입니다. 나는 오늘의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가진 자와 누르는 자가 밉기 이전에 없는 자와 억눌린 자가 불쌍한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있을 수 없는 정치풍토에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 현실은 사람된 보람도 국민된 긍지도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이제는 자다가 깰
때입니다. 더 이상 악령에 사로잡혀 춤을 추어서는 안 됩니다. 양심과 인간의 기본 진리가 주장되어져야 할 때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열매는 없을 것입니다." (이해학 양심선언 중에서) 그리고 NCC 김관석
총무의 방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김진홍 목사님이 쓴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들의 용기는 사회는 물론 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누구보다 놀랜 것은 법을 제정한 사람들이었으리라. 이해학 전도사는 1심과 2심에서 15년을 선고받았다. 물론 대법원에서도 확정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은 있었다. 그토록 존경하던 장준하 선생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영광을 가졌다. 또한 요가를 수련하는 동안
지병인 위장병이 깨끗이 나았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새롭게 맛보고 큰 은혜를 받았다. 이해학 전도사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주민교회
교인들은 똘똘 뭉쳐서 투쟁했고, 이 해학 전도사가 1년 여 만에 형 집행정지로 좁은 감옥을 박차고 나왔을 때는 교회가 기관의 압력에 의해
전세들었던 건물에서 추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기노회가 건물을 얻어주고 설립예배를 성대하게 주관하여 주민교회가 공인된 교회로서 등록을 하게
되었다. 주민교회로서는 침체를 털고 일어나는 전환점이었다. 주민교회는 보통의 교회들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직업상담실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이유 없이 해고당하고 악덕 직원들에게 희생되는 것을 막았다. 또한 노동자들을 위하여 야간학교를 만들었고, 여신도들은 공동구판사업을 운영하면서
참기름을 짜서 그 이익금으로 야간학교를 지원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법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의료협동회원을 모아서 주민들이 함께 치료하는
방법을 찾았다. 한의사와 서울대 사회의학연구회의 회원들이 전문의 과정을 수련하면서도 성심껏 환자를 돌보았고 간호원은 가정방문을 하여 상담과
교육과 예방의학을 위해 활동했다. 회원들은 한 달에 200원 씩만 내면 전 가족이 치료를 받았다. 정말 성남시가 기운을 차리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극심한 감시와 방해 속에서도 열심히 모였다. 이해학 전도사는 교회의 40평 전체 건물을 낮에는 노인들, 밤에는 학생들에게
개방하자는 제안을 하고 반대자들을 설득시켜 낮에는 경로당, 밤에는 공부방을 운영했다. 사람들은 이해학 전도사를 중심으로 자신을 바뀌어가기
시작했고, 또한 그들이 속한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1976년,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3월 1일, 주민교회 창립 3주년 및 3 1절 기념행사에 강사로 오셨던 문익환 목사님은 그 길로 명동성당에 가서 '민주구국 선언문'을 발표했고
'정부전복 내란 음모죄'라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 선언문에 서명을 했던 사람들도 무더기로 체포 수감되었다. 함석헌 선생님은 수염이 모두 뽑히고,
이우정 선생님은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다. 참으로 치가 떨리는 일들이었다. 그런데 이해학 전도사는 정부에 의해 회수조치가
내려진 '민주구국선언문을 한 부 입수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해학 전도사는 선언서가 그의 손에 들어 온 것을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세상에 진실을 알리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정말이지 폐쇄된 제도언론을 일방적으로 악용하는 군부독재의 음모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분에 젊은 이해학 전도사는 온 몸을 떨었다. 그러나 청년회장 김금용(현 남원제일교회 목사)을 시켜 복사하여 목사들에게 나누다 집요하고
살벌한 경찰의 그물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해학 전도사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수난과 공포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의 야간학교는
강제로 폐쇄되었고, 교사를 하던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제적되었으며 강제로 집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의료협동회도 중지되고, 전교인이 감시,
가택수색을 당했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협박이 가해졌다. 정부기관에서는 이해학 전도사가 3 8선을 넘어갔을 거라는 참으로 흉흉한 소문을
퍼트리며 교인들에게는 "왜 하필 빨갱이 교회를 다니느냐? 다른 교회를 다니면 집사를 시켜 주겠다. 집을 사 주겠다." 등 갖은 협박과 회유를
자행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어떤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해학 전도사의 가족들이 당한 고통 또한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오는 손님도 몸수색을 당했고 어린 딸아이가 소풍을 가는 곳까지 정보부의 요원들이 따라
다녔다. 이해학 전도사의 가족이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골의 친척이 인절미를 해서 가져오자 경찰서로 납치해 떡 하나하나를 가위질하는 희극적인
소동까지 벌어졌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일 벌어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이
미친 일들이 벌어지는가? 문제가 되었던 '민주구국선언문'은 "이 나라가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다" 라는 지극히 지당하고 온건한 제안서에 불과했다.
수배생활을 하던 이해학 전도사는 1975년 9월 5일 자수를 하였고,
3년형을 언도 받고 안양교도소 독방에서 2년을 보내게 된다. 1978년 8월 15일에 출소한 이해학 전도사는 그간에 함께 진리의 행진을
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등돌리고 떠난 것에 충격을 받는다. 이제 더는 빼앗길 것이 없는 발가벗은 노동자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얻는다. 오히려 자신의 뼈대를 키우는 바람이었고, 통일의 역군으로 정금 같이 단련하는 용광로였음을
고백하면서 실수를 통해서도 승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다시 시작한다. 그런 이해학 전도사를 영원히 못박아 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종태'라는 노동자다. 1980년 초 안개정국 속의 봄은 너무나 빨리 가버리고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광주민중항쟁에 피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질서도 법도 정의도 없던 시절, 하나님도 없을 것 같은 잔인한 세월 속에서 이해학 전도사는 전도사 8년만에 목사가 되기 위해 시험을
보러 간다. 그런데 이해학 전도사가 목사고시를 보던 그 순간, 신촌 이대 앞 네거리에서 주민교회 청년인 김종태 노동자가 밤새 쓴 유서와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는 글을 이해학 전도사에게 남기고 분신을 한다. 김종태 청년의 분신 앞에 이해학 전도사는 모든 것이 무너졌고,
무거운 역사의 짐을 진 채 1980년 9월 경기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해학 목사님은 생명의 공동체를 다지기 위해 이 땅의 꼴찌들과
김종태 청년이 가고자 했던 길을 끝까지 행진하리라는 결심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주민교회는 1981년 이후 지금까지 해마다 주민연극제와 마당극을 개최하고 있으며, 어린이선교원을 개원(1984년)하는 등 주민
속에서 주민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생활하는 교회로 자리하고 있다. 주민교회는 머물러 있는 교회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위한 송년잔치는
물론이거니와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연탄기증운동을 전개했다. 이해학 목사님은 1986년에 개헌서명운동을 이유로 다시 한번 불구속 입건되었으나,
쉬지 않고 나라와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 통일을 위한 어머니 금식기도회 등을 열었다. 또한 경찰의 방해와 협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호헌철폐 및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연속기도회를 개최하였고, 5 17 광주민주항쟁 희생자와 故 김종태 청년 추모행사를 해마다 열었다. 사회의 아픈
구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고, 신음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웠으며 병든 사람에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었다. 굶주린 자에게는 양식을,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따뜻함을 제공하고, 집을 잃은 자들을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어떤 힘이 왜소한 체구의
목회자로 하여금, 가난한 교인들로 하여금 그런 열정과 사랑을 갖게 하였을까? 쉽사리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저려오는 벅찬 감정에
휩싸일 때마다 떠올랐던 것은 모세를 부르시던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을 듣고도 얼마나 많이 게을렀던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만큼은 짐짓 못 들은 척 얼마나 많이 피해 갔던가? 그러나 주민교회는 달랐다. 이해학 목사님과 성도들은 커다란 믿음의
용사들이었다. 고난받는 이웃을 위한 옥합운동도 그렇거니와 일찍부터 민족의 통일을 소망했다. 소망은 늘 마음속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졌다.
재야통일 운동의 지도부(전민련 자주평화통일 위원장,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역할을 하던 1990년 독일 베를린에 가서 민간 남북해외 지도자들과
통일문제를 협상하고 돌아왔다. 결과는 다시금 강제 연행되어 1년 6개월 동안 다시 징역을 살게 되었지만 이미 이해학 목사님의 통일을 향한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담임목사가 구속되어 있어도 교인들은 주민생활협동조합을 열기 위해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결국 조합을 탄생시켰다. 그
뿐이 아니었다. 통일 강연회를 비롯한 모든 일정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여기에서 잠시 주민교회가 통일을 향하여 줄달음질했던 일을 적어보자.
12회에 걸친 통일 강연회 개최, 통일을 향한 협동 마라톤, 통일 춤판, 통일민족을 향한 함께 사는 운동 시민 대강좌, 통일 희년 토론회, 통일
희년을 열어 가는 예수공동체 신앙강좌, 통일희년헌금통장개설, 북한돕기 빵나눔, 사랑나눔 거리모금, 백두산 통일기행, 등 등 참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해학 목사는 주민교회 성도들과 함께 통일을 향하여 줄기찬 행진을 하면서도 세계 속에서 세계를 향한 생명공동체가 되고자 했기에
외국인 노동자들과 중국에서 온 동포들도 품에 안았다. 그들은 잘 살고 싶은 커다란 꿈을 가지고 한국이라는 배를 탔지만, 불법체류자라는 사슬에
묶여 한국 땅에서 마음놓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임금이 몇 달씩 체불되어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주민교회는 그들이 산업재해나 폭행,
혹은 사망이나 추행 등의 부당한 처우를 당하지 않도록 돕기 시작했다. 교육관으로 쓰던 곳을 쉼터로 내 주자 아프거나 갈 곳이 없는 노동자들이
머물면서 힘을 얻었다. 주민교회는 단 한 순간도 안일하게 멈추어 본 적이 없는 교회이다. 고통을 겪고있는 사람들한테서도 그러했지만 언제나
역사와 함께 했다. 주민교회는 또 하나의 운동을 전개한다. 주민생활협동조합을 통해 무르익어가기 시작한 생명운동, 그것은 바로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공동체의 모습이다. 교인들은 많지 않아도 주민교회의 대부분의 행사가 성남지역의 행사로 치러지듯이 주민생활협동조합의 회원은
어느덧 2000세대가 넘었다.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리라. 주민생활협동조합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동으로
구입함으로서 거대자본의 횡포로부터 자신을 지킬 뿐 만 아니라 이윤을 중심으로 한 경쟁구조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행복,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또한 척박해진 땅을 살려내고 농민의 생산과 생활을 보장하고 소비자의
주권도 실현시킨다. 우리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생활협동조합은 조합원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먹거리뿐만 아니라 생활과 교육과 문화를 함께 나누고
이루어가는 일을 한다. 어머니들이 만들어가는 '창조학교'는 이미 어린이 교육의 장으로서 모범이 되었다. 추억을 잃어버린 우리의 아이들, 고향이
없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고향과 추억을 찾아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과 이웃의 아이들을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아이들로 길러가고
있다. 이렇게 생활협동조합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생활협동조합에서 좋은 이웃을 만나고 건전한 생활문화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서 아름답게 실현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빈민선교로 시작해서 불가피하게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고,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인 통일운동 또한 선교과제로 삼은 교회, 지역사회와 역사, 민족이라는 범위로 확대해서
한국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먼저 가서 실험하고 투쟁하고 전위대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는 주민교회는 봉사 또한 다른 교회와는 너무나 다르다.
주민교회의 봉사는 그야말로 사회 봉사이다. 역사참여 방식으로 악법을 고치고, 구조적인 악을 개혁시키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반혁세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주민교회는 '주여! 주여!'만을 외치지 않는다. 주민교회의 예배는 그야말로 삶을 실천하는 고백교회이다. 교육과 친교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와 함께 친교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교회이다. 회색빛이었던 성남시가 눈부시게 일어나도록
기꺼이 밀알이 되고 원동력이 되어준 교회, 이 땅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이 없는 꼴찌들이 모여들었던 주민교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고린도전서 1장 26절부터 31절까지)을 붙들고 지극한 마음으로 순종을 했고,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고자 하는 주민교회의 성도들과 이해학
목사님, 이제 주민교회는 선교방향을 세계를 사는 "생명공동체"로 규정하였다.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교회라면 그 모습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온전하게 확장되고 실현된 곳이 아닐까? 많은 교회들이 지역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만큼 소아(小兒)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가 앞장서서 은밀하게 악을 저지른 적도 없지 않다. 교인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살도록
하지 못했다면 그 또한 죄악이 아닌가? 그러나 유신치하와 독재정권 아래에서도 옳은 소리를 끊임없이 쏟아 놓았던 사람, 그래서 이
사회를 그나마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기꺼이 밀알이 된 사람, 주님을 위하여 낮은 자의 발 아래 엎드린 사람, 지친 자의 언 손을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려 애쓰고 있는 사람,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힘들고 슬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졌던
사람, 이해학 목사님! 누구든 그 분을 만난다면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리라. 이해학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땡볕아래서 수 시간의 노동을 감수해야만 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땡볕 속에서의 노동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도 쉬지 않으시고 일을 하시는 이해학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그 어떤 것에도 단련이 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목사님과 마주 앉았다. 그때부터 나는 또 한번 역사에 대해 그토록 무지했던 나 자신을 목격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목사님이 주신 주민교회의 역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나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학 목사님의 삶은 우주처럼
광대해서 감히 나 같은 것이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쓰기 시작했고, 쓰면서 자꾸만 울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목소리가
간절히 그리웠다. 그 숱한 역경의 세월을 보냈음에도 소년처럼 맑은 웃음과 동안이신 얼굴, 그리고 자상함과 따듯함, 혁명가가 분명할진대 목사님은
내가 손을 감추고 있어도 얼른 잡아주실 것만 같은 분이었다. 대화 중에 주민교회가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에 적잖이 놀랬다.
정말 보통의 교회들과 너무나 많이 달랐다. 그러나 어떻게 교회가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게 되었냐고 여쭈었을 때 목사님의 대답은 단순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요. 눈이 발목을 푹푹 덮고 있는데 여섯이나 되는 어린아이들을 주루룩 데리고 길에 서 있는 거여요, 그 분은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고 있던 분이었지요. 그런데 50만원의 방세를 내지 못해 쫓겨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용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랬다. 목사님은 무슨 일을 하시던 지 어떤 거창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 가엾은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방 한 칸 마련해 주어야한다는 생각, 가난한 사람일수록 꼭 필요한 때에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 당연함을 알고 있었고,
알고있던 것을 정직하게 실천했기에 군사독재 앞에서도 항거했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꼴찌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시대의 사명을 실천했기에 이해학 목사님과 교인들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사는 아름다운 삶을 엮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해학 목사님이 힘껏 두드리는 저 북소리, 나는 지금 죽은 심령을
일깨우는 생명의 북소리를 듣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저 북소리는 이세상 온 천지에 울리면서 사람들을 깨울 것이다. 둥 둥 둥 둥 둥!
* 출처 : http://minjungtheology.org/magazine/magazine_read.asp?fdMonthSeq=23&fdSeq=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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