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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그의 얼굴을 그대 위에 [밝게] 비추시고...” - 아론의 축복(민 6:24-26)에 대한 단상(3) 이주형 (pfrrhee)
2026년 08월 09일 15시 46분 03초 13

[그런데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과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어떨까? 만일 그분의 ‘얼굴’이 마치 햇빛 같이 환하지 않고 짙은 구름 낀 하늘과 같다면 어떨까? 보기 싫은 경우에는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제대로 보기를 거부함으로써 그 태도를, 그 태도에 따른 감정을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다. 동양의 경우, 어른을 두 눈뜨고 똑바로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문화권에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눈 약간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오히려 화가 나서 싸울 태세면 눈을 똑바로 본다. ‘어디 버릇없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래!’ 그런데 서양의 경우엔 그 반대다. 눈을 어긋나게 하는 것은 ‘기피하는 것’이자 무관심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행위다. 무례다. 그래서 얼굴을 봐야 하고 특히 눈을 쳐다보아야 한다. 이것이 이 문화에 낯선 이들에겐 힘들다. 처음에는 일부러, 억지로 눈을 보아야 하고, 곧 익숙해지긴 하지만, 싸움하듯이 부릅떠야 한다. 매우 의지와 노력이, 즉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2-3. 다른 축복/축원들

성서기자는 이 축복문에 삶의 모든 것을 담았다. 외적 보호(aʹ)와 내적 수용[포용](bʹ)의 필요가 포함되어 있다. 짝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축복문에서 두 번째 부분들(aʹ. bʹ. cʹ)은 각 절의 앞쪽 즉 전반부 기원의 구체화다. (이 축원은 순차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aʹ→bʹ→cʹ) 1) 악의로 대하는 이들로부터 우리는 지켜주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달려드는 자들의 위협에 우리가 직면해 있으며, 우리는 굳건한 요새와 산성, 바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의 인생은 ‘살을 뜯어먹으려는 이들’(시 27:2)에게 포위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많은 위험과 사고가 도처에서 또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난다. 2) 또한 우리는 외부로부터, 혹은 원수들로부터만 위협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시지 않으면, 그분이 봐주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다. 과연 누가 자신이 그렇게 내면의 깨끗함과 떳떳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으면 또 살아가고 있는가? 언제나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cf. 시 14:3; 143:2). 우린 그저 하나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사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또 그런 아버지의 긍휼과 용서가 없으면 –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은총이요 그것으로 우리가 지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 안 되는 먼지요 풀이다(시 103:13-15). 아론의 축복문은 부정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복이 불가불 필요한 삶이며 우리의 삶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복주심에 의존해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복은 인간의 행동여부에 종속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cf. 마 5:45)]. [위에 언급한 사전은 ‘축복’을 ‘행복을 빔, 신의 은혜를 구하여 빔’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이미 축복문의 내용 중의 하나인 은혜가 언급된다]. 앞뒤의 구조상 이 둘은 물론 서로를 규정하고 보완한다. 보호는 은총이며 은총은 보호다. 말하자면 내외의 통전적 복이다. 보호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으로부터이기도 하며 [자기가 자신의 가장 큰 적이다. 보호는 유혹에 빠지려는 자신으로부터의 구출이기도 하며 그 유약한 자신을 덮어주는 덮개이기도 하다] 은총은 곧 외적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기도 하다. 아론의 축복문은 보호와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삶의 내외적인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자 한다. 그것의 지향점은 평화다.

 

2-4. 축복의 지향점: 평화

축복은 평화로 귀결된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23절)는 요구로부터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27절)는 약속에 담긴 아론의 축복은 그런데, 히브리어 축복문 단어의 순서에서 볼 수 있듯이(위 iii) 1a→3cʹ 참조) 샬롬이다. 평화는 축복문이 지향하는 결론이다. 샬롬은 하나님의 강복기원으로 문을 연 축복문의 마지막 단어다.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는 그렇게 축복문을 감싼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어 평화를 선물하시길...’ 혹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평화로/평화라는 복을 주시기를...’ Der Herr segne dich, indem er dir Frieden gibt/gebe... Der Herr segne dich mit Frieden...]. 실제로 히브리 문장은 점점 길어지고 확대되면서 (매우 시각적이다!) 세 번째 축복의 내용인 샬롬을 향해 가는 모습이다(cf. 욥 8:7). 평화는 지향점이자 목적지다. 각 축복의 두 번째 부분들이 연결되어 결말을 향해 가는 구조로 볼 때(aʹ→bʹ→cʹ) 평화에는 외적이고 내적인 위협을 덮는 복의 두 차원이 담겨있다(aʹ+bʹ⇒cʹ). 사회적 안녕의 조건과 내면적 평안이 포함된 것이다. 즉 평화는 보호와 은총으로 표시되는 내용이다. 더구나 이 단어는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되는 유일한 명사다. 다른 무슨 제한이 없다. 하나님의 강복의 목적이자 축복을 받는 이들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더불어’ 누리는 복의 상태다(cf. 창 12:2-3; 39:2). 여기서 평화가 단순히 내적 평화일 수 없는 이유다. 관계없이 불가능한 것이 평화다. 기원되는 평화란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총체적인 강녕이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축복은 여기 평화/평강을 비는 것에서 결말을 이룬다. 복의 내용이다(참고. 신 29:18; 시 29:11).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이 들어가는 집에 인사를 하라고 – 강녕을 빌라고 – 하시고 그러면 그 집에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라 하셨다(마 10:12-13). 전도는 평화의 마음으로 하는 인사의 형식 속에 평화의 선포를 확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