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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1. 오사와 타너, 나사로의 부활, 1896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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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0년 05월 30일 19시 48분 22초

<2020.5.31. 주보 그림 >

오사와 타너, 나사로의 부활, 1896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예수님이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의 거점이 나사로 남매의 집이었다. 누구보다 이들 삼 남매를 사랑하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사로가 죽었다. 죽기 전까지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붙잡고 몸부림치지만 일단 죽으면 끝이다. 나사로가 죽었다, 잠시 잠든 것이 아니라 죽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 그 절망과 통곡의 현장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모두가 숨죽인 순간에 주님은 죽음의 공간, 무덤을 향해 양손을 펼친다 - 나사로야 일어나 나와라!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땅속에서 부패해야 할 나사로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다시 땅 위로 올리고 있다. 분명 나흘 전에 그의 얼굴과 몸은 죽음의 기운이 지배했건만, 똑같은 그 몸에 지금은 다시 생기가 돌고 있다. 사람들의 동공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노인은 입을 벌리고 양손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누구보다 슬퍼하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너무 놀라 말을 잊는다. 마리아는 있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리를 감싸고 이것이 꿈일까 하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다. 기적이 일상이 되면 자연이 깨지고 일상이 기적이 되면 삶이 신비로워진다. 기독교 신앙은 일상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언제나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는 기적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하나님의 기적을 알량한 인간의 과학 지식으로 재단하자 말라.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내 삶에 들어와 부활을 실현시킬 모든 준비를 다 하고 계신다. 남은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종언이다. 세상의 종말이다, 최소한 당사자에게는! 결국 종교는 죽음 앞에서 생긴 것이며, 그래서 종교는 정치‧경제‧사회 등에 대해서는 몰라도 죽음에 대해서만은 분명한 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 믿어 의심치 않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답이 200년 전부터는 공허해졌다. 진보 신학은 이 믿음이 지나치게 타계적이어서 역사 현실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아편과 같다고 맹공을 퍼부었고 그러지 않아도 세속적 지성에 의해 위태로웠던 이 믿음은 마침내 붕괴했다.

문제는 그러면 뭐냐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예수 천당’을 대체하려했지만 사실 이 물음과 대답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개인의 죽음과 역사의 종말에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는 기독교가 생존할 수 있을까, 종말 대신 어떤 사회 정의와 도덕을 대체하려한들 가능한 일일까,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사회 복지 측면에서 어느 정도 하나님 나라에 근사치로 다가간 현대 한국사회가 죽음에 대한 답을 뚜렷하게 주지 못하고 겨우 장례식에서야 한번 맥없이 ‘이 영혼을 받아주시고’라고 읊조리는 현대 한국교회에 만족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근본적 위기는 여기에 놓여 있다.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대부분의 교회가 개인의 종말에 무관심하며 역사 내적 문제에 천착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라고 고집하는 한 한국교회의 미래는 그 어떤 프로그램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날마다 내 눈 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포장하는 교회를 현대인은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절기 마지막 날에 다시 죽음을 묻는다.